매스미디어와 미국 대중문화의 은밀한 노림수를 드러내 보이다
프랑스의 비판적 지성, 이냐시오 라모네
초창기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해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차라리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언론의 자유 신봉자들을 이따금 본다. 만일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정부와 신문, 둘 다 없이 살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아나키스트를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정부와 신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얘기다. '신문 없는 정부'니, '정부 없는 신문'이니 하는 표현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둘은 공생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실된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문과 정부의 속성은 일치한다
초창기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인용해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차라리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언론의 자유 신봉자들을 이따금 본다. 만일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정부와 신문, 둘 다 없이 살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아나키스트를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정부와 신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얘기다. '신문 없는 정부'니, '정부 없는 신문'이니 하는 표현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둘은 공생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실된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문과 정부의 속성은 일치한다.
아무튼 이냐시오 라모네의 『커뮤니케이션의 횡포』(민음사, 2000)를 읽고 나서 가급적 텔레비전 뉴스를 보지 않겠다는 새삼스러운 결심을 했다. 권력집단화한 현대 언론의 실상을 파헤친 이 책은 자연스럽게 매스미디어와 거리를 두게 한다. 라모네는 요즘을 실제 전쟁만이 정보와 뉴스의 집요한 공격을 피할 수 있다는 가상의 정보화 시대로 보고, 이런 시대에는 "미디어의 무의식적인 모방과 과잉정서"가 정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다고 말한다.
또, 라모네는 미디어의 상호모방과 과잉정서의 중요한 결과로 전세계가 언제라도 '미디어의 구세주'의 출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자들과 미디어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민들은 동정과 감정에 근거하는 전세계적인 담론을 지닌 인물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 성녀 테레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마하트마 간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등이 그런 인물이다. 곧, 그들은 "정치를 텔레비전 복음주의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실천에 옮기지 않고서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꿈꿀 것이며, 혁명 아닌 급격한 변화라는 장밋빛 예언을 할 수 있을 어떤 인물"이다.
라모네는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스미디어의 필수불가결한 기능을 부인하진 않지만(나도 그렇다), 미디어에 관한 의혹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고 말한다. 언론에 대한 의혹과 불신은 흥미 본위의 뉴스, 이미지에 대한 현혹, 그리고 민주적 검열 같은 것이 야기한다. 텔레비전 뉴스는 "내가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것이 기술적이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말하지만 시청자는 이렇게 맞받아 친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진실되다면 그 뉴스는 진실된 것이다."
언론은 입법, 행정, 사법의 전통적인 세 가지 권력과 함께 제4의 권력을 이룬다고 말해진다. 예전에 언론권력을 다룬 J.L. 세르방의 책이 『제4의 권력』(전예원, 1978)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라모네는 "시민들이 제4의 권력의 비판적 기능이 아직도 수행되고 있는지 의심할 정도로 지배 미디어와 정치권력 사이에 일종의 혼합이 존재한다"면서 권력들 사이의 새로운 위계를 제시한다. 라모네에 따르면, 오늘날 제1의 권력은 경제가 행사하고 있고, 두 번째 권력이 바로 미디어적인 것의 차지가 된다. 정치적 권력은 세 번째 위치를 점한다.
라모네는 기자들의 앞날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들은 도태되고 있다"는 것이 라모네의 단도직입적인 진단이다. 기자의 씨가 마르고 있는 것은 뉴스 체계가 더 이상 그들을 원치 않고, 기자들 없이도 언론사가 잘 굴러가고 있어서다. 다시 말해 "기자들은 통신사로부터 송고된 기사를 손보는 역할로 격하되었다." 이렇게 기자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모든 사람이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참가하게 되어 기자가 정보 독점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기술들 또한 기자정신의 특수성의 소멸을 촉진시킨" 까닭이다. 그래서 이제 기자는 인스턴트 기자가 되었다.
"어원적으로 '기자(journaliste)'라는 용어는 '하루의 분석가'를 의미한다. 그는 아무리 신속하게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날 일어났던 것을 분석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오늘날 생방송과 현지시각으로의 방영으로 인해, 분석해야 하는 것은 순간이다. 순간성이 뉴스의 정상적 리듬이 되었다. 기자는 그러므로 '즉석주의자' 또는 '순간주의자'라고 불려야 한다."
라모네는 오늘날 시민들이 미디어에 기대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미디어의 자기비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어떤 직업이나 삶의 분야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게 엄격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기대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 같다. 1981년 7월 29일 영국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의 결혼식 생중계 화면에서 말들의 똥이 튀지 않게 나오도록 왕실의 말들에게 일주일 동안 똥이 카메라에 잘 받는 색을 띠게 하는 특수 알약을 먹일 정도의 텔레비전 연출자들의 강박심리는 애교스럽게 받아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과 공모한 뉴스 조작의 사례들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걸프전 동안 가장 유명한 허위보도는 이라크 군인들이 병원에 난입해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유아를 꺼내 살해했다는 '사실'을 눈물을 흘려가며 증언한 젊은 쿠웨이트 간호사의 인터뷰를 내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두가 거짓이었다. '간호사'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워싱턴 주재 쿠웨이트 대사의 딸이었다. 그리고 인큐베이터 사건은 레이건 대통령의 전 홍보참모였던 마이크 디버와 미 홍보회사 힐&널튼의 순전한 상상력을 통해 완전히 날조되었다."
헌데 이러한 날조와 조작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서도 재현되었다. 그것은 바그다드에 들어온 미?영 연합군을 환영하는 인파와 후세인동상 쓰러뜨리기에 참가한 이라크인에 대한 간단한 분석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났다. 다분히 구소련의 붕괴를 상징하는 레닌 동상 철거를 본뜬 후세인동상 쓰러뜨리기에 대해 《TUP속보》(제49호, 2003년 4월 14일)는 이렇게 전했다.
"그 며칠 전에 미국방부가 고용한, 이라크 망명자이자 차기 괴뢰정권의 지도자로 지명된 아메드 차르바이가, 미군 군용기를 타고 낫시리아에 착륙했다. 그때, 차르바이의 측근의 얼굴사진과 3일 후에 쓰러뜨린 후세인동상 위에서 춤을 추는 이라크인의 얼굴사진이, 위에서 소개한 사이트에 게재되어 있으니까 비교해보기 바란다. 양쪽 사진에는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사람들이 찍혀 있는지. (자연발생적으로 모여들었다는) 수많은 이라크 시민들은 실제로는 수십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미군이 고용한 대리인들이 그속에 섞여 있었으며, 그들은 부시정권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파갠더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서, 특별히 낫시리아로부터 바그다드로 파견되었던 것이다."(토다 키요시의 『환경학과 평화학(녹색평론사)』 후기에서 재인용)
정보를 얻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라모네가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이자 커뮤니케이션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방책이다.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아무런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생산적인 활동이며 진정한 지적인 동원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그 시간, 돈, 관심의 일부분을 그것에 바칠 수 있을 만큼 고상한 활동인 것이다."
라모네의 결론은 한글판 『커뮤니케이션의 횡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온 지 3년이 지난 이 책은 현재 품절 상태에 있다. 대부분의 서점에는 이 책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발품을 팔아 서울의 어느 대형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수 있었다. 책은 어렵사리 입수했어도 책의 내용은 기대 이상이었다. 내용이 쏙쏙 머리 속으로 잘도 들어 왔다.
한글판의 부제목이 '우리 정신의 미국화'라 붙여진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상형문자, 2002)는 "(영화, 특히 텔레비전) 영상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어떻게 영상들이 삶을 만나거나 반영하는지 보여주려 한다." 특히 "어떻게 텔레비전과 대중영화가 중대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맞추어진, 그리고 상징적 보조물처럼 집단적 감성을 동반하도록 예정된 특별한 영상들을 만들어왔는지를 (신중하게) 알려 주고자 한다."
책에는 1970년대의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물이 사례로 많이 등장한다. 이 책이 1981년 출간된 『눈으로 씹는 추잉 껌Le chewing-gum des yeux』을 2000년에 전면 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례 중에는 7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내게도 친숙한 영화와 TV 프로그램이 많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우리의 심기는 몹시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문화전환자(트랜스컬처)'여서다.
"우리 정신의 미국화 현상은 너무나 진행되어 있어서 그것을 고발한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점점 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미국화의 길을 포기하려면,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즐겨왔고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수많은 문화 행위들-의상, 스포츠, 놀이, 오락, 언어 음식-을 잘라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라모네는 텔레비전이 정보, 교육, 오락의 세 가지 기능을 갖는다는 사회학자들의 견해를 언급한 다음, 인터넷의 세 가지 주요 기능이 "감시, 광고, 판매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아울러 자발적인 정신의 노예화를 경계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정신의 복종과 통제가 힘이 아니라 유혹에 의해,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바람에 의해 정복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한다."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의 사례 분석은 광고, 재난영화, TV수사극, 베트남전쟁 영화, 이탈리아 서부극, 전쟁을 소재로 한 코미디영화, 그리고 투쟁영화의 순으로 진행된다. 광고가 프로그램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이 광고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광고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광고는 프로그램처럼 지각되기보다는 텔레비전의 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도중에 나오는 중간 광고는 텔레비전의 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것은 중간광고가 허용되는 미국의 TV물이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 외국으로 수출될 때 아주 극적으로 표출된다. "이렇게 해서 광고는, '광고가 부재할 때'조차도 텔레비전 이야기의 구조를 변형시키는 능력을 발휘한다."
재난영화에서는 1972년작 〈포세이돈 어드벤처〉에 대한 분석이 이채롭다. 이 영화는 필자도 꽤 오래 전에 TV의 명절 특선을 통해 보았다. 이제는 줄거리도 제대로 기억 나지 않지만 영화가 '신화적 모델'에 입각해 있다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라모네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하다. 라모네는 재난영화들에 "군대나 경찰 또는 '하늘이 내린 사람들'과 같은 기구들이 위기에 빠진 사회의 보수와 재건을 담당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깊은 소망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수사극 〈코작〉과 〈형사 콜롬보〉를 다룬 글에서는 〈형사 콜롬보〉의 초창기 시나리오와 연출 작업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참여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재난영화를 보는 라모네의 안목도 탁월하지만 베트남 전쟁, 이탈리아 서부극, 전쟁 소재의 코미디 영화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영화평론가를 뺨치는 수준이다. 베트남전쟁 영화를 분석하는 대목에서 라모네는 〈디어헌터〉와 〈지옥의 묵시록〉을 반전 영화라 여기는 우리의 해묵은 관행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에 따르면, 〈디어헌터〉는 "무엇을 결정하든, 미국 정부가 옳으며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시민들"이라는 단순한 정치적 교훈을 전달할 뿐이고, 〈지옥의 묵시록〉은 "베트남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진짜 의미를 숨"기며 "항상 제국의 관점을 옹호"할 따름이다.
기존 체제에 맞서는 대항영화라고 할 수 있는 투쟁영화에 대해 라모네는 아주 비판적인 관점을 취한다. 그것들이 이데올로기의 표면을 건드리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투쟁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소외된 소수들이라고 서로를 겁주고 자신들이 늙어가고 있음을 보지 못하며 위협적인 '소시민화'의 경계선들을 쉬지 않고 후퇴시키며 자신들의 고유한 순응주의를 완전히 무시"해서다.
1943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라모네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주간이면서 파리 7대학 커뮤니케이션 학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촘스키와 함께 펴낸 책이 있는 라모네는 비판적 성향이 여러 모로 촘스키와 비슷하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두 권의 책은 촘스키와는 구별되는 그만의 장점을 잘 보여준다. 라모네는 미디어의 현상 분석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 문체 면에서도 이제는 진부하게도 비쳐지는 촘스키에 비해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하지만 9?11과 대테러 전쟁, 중동 분쟁, 세계화와 반세계화, 코소보 전쟁 같은 세계적인 이슈를 다룬 시사 논평을 묶은 『21세기 전쟁』(중심, 2003)에서는 라모네의 그런 장점이 약간 덜 드러난 듯하다. 그래도 세계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충실한 정보를 전달하고, 사건을 보는 명확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무조건적인 기본 소득을 신설해야 한다"는 제안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태어날 때부터 가족적인 또는 직업적인 지위의 조건과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소득말이다. 이 원칙은 아주 혁명적인데,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생존 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 라모네의 글을 볼 수 있는 책은 두 권이 더 있다. 두 권 모두 앤솔러지다. 최병권?이정옥이 엮은 『아메리카』(휴머니스트, 2002)에는 라모네의 짧은 글 세 편이 실려 있다. 주제는 『21세기 전쟁』과 중복되는데 「아듀, 자유의 여신」은 내용도 많이 겹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펴낸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백의, 2001)에는, 그 잡지의 편집주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지만, 이냐시오 라모네가 서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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