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북한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일본인이다
와다 하루키
서 실장의 논문 지도교수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친북인사란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다. 친북 성향의 지도교수 밑에서 배운 서동만도 친북이란 논리에서 나온 이 주장은 그 전제부터 취약하다. 와다 교수는 북한의 국가체제가 67년부터 72년에 걸쳐 건설되었고 그 토대는 61년에 만들어진 국가사회주의체제라고 본다. 와다 교수는 북한에 대해 수령을 사령관으로 받들며 전 인민은 항일유격대원의 자세로 생활하고 학습하고 생산하는 국가인 '유격대 국가'라고 말했다. 그는 유격대 국가는 일종의 커다란 쇼 내지는 연극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런 주장을 펴는 학자한테 '친북'이란 딱지를 다는 것은 '무식한' 일이다."
지난 4월, 그간 북한 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만 잘 알려졌던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의 이름이 잠시 우리나라 방송과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다. 4월 22일 있은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가정보원장 인사청문회에 증인 자격으로 출석한 서동만 상지대 교수를 상대로 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가 거명되었다. 당시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으로 내정된 서 교수를 향해 일부 국회의원은 색깔론을 들고 나왔는데, 야당의 이 아무개 의원은 서 교수의 박사논문을 지도한 와다 하루키 교수가 친북인사라 서 교수가 그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폈다.
이 문제에 대해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은 '그 딱지, 무식하다'(제458호, 2003년 5월 15일자)는 제하의 약간 뒤늦은 분석 기사를 통해 와다 하루키 교수가 친북인사라는 일부 의원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 실장의 논문 지도교수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친북인사란 주장도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다. 친북 성향의 지도교수 밑에서 배운 서동만도 친북이란 논리에서 나온 이 주장은 그 전제부터 취약하다. 와다 교수는 북한의 국가체제가 67년부터 72년에 걸쳐 건설되었고 그 토대는 61년에 만들어진 국가사회주의체제라고 본다. 와다 교수는 북한에 대해 수령을 사령관으로 받들며 전 인민은 항일유격대원의 자세로 생활하고 학습하고 생산하는 국가인 '유격대 국가'라고 말했다. 그는 유격대 국가는 일종의 커다란 쇼 내지는 연극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런 주장을 펴는 학자한테 '친북'이란 딱지를 다는 것은 '무식한' 일이다."
와다 하루키의『북조선』 (돌베개, 2002년)은 그에게 친북 딱지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무식한 일인지 잘 말해주는 책이다. 보는 이에 따라 이 책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겠으나, 적어도 내게 이 책은 북한의 진실을 알려준 고마운 책이다. 김일성의 젊은 시절 행적과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 한국전쟁시 북한?중국?소련의 동향, 북한의 정체성과 외교전략의 본질 등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명확히 알게 되었다.
『북조선』은 자유주의적 관점을 지닌 나 같은 독자에게 북한 체제 비판서로 읽힌다. 초등학교에서 군대에 이르는 15년간 숱하게 이념교육을 받았으나, 그것들은 맹목적 반북 논리에 치우친 탓에 왜 북한을 비판하는가에 대한 깨우침은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부풀려진 측면은 여지없이 지적하는 와다 하루키의 서술은 북한 체제의 맹점을 아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 그런 점에서 와다 교수를 '친북'으로 모는 일부 국회의원이 오히려 친북적이지 않냐는 의구심이 인다.
와다 하루키는 북한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역사적으로 생각한다"는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 눈앞의 북한의 모습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 놓고 봄으로써 표면적인 관찰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역사 연구를 아주 엄격히 통제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속성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와다 하루키는 북한 역사의 태동기와 한국전쟁 이전의 시기에 주목하게 된다.
본래 일본의 대표적인 러시아?소련사 학자였던 와다 하루키는 「소련의 조선정책, 1945년 8월∼1946년 3월」을 북한 관련 첫 논문으로 발표한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출간된 『북조선왕조 성립비사』라는 책에 자극받아 해방 후 북한의 역사를 살피는 것은 잠시 미루고, 김일성과 만주항일투쟁을 본격적으로 파고 들기 시작한다.
학교의 도덕?국민윤리 시간에 배우고, 신문?방송에서 복습시켜준 대로 우리는 '김일성은 가짜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만, 와다 하루키는 중국의 문헌 자료를 토대로 김일성이 진짜임을 논증했다. 그는 1985년 발표한 논문에서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싸웠다는 북조선의 설명은 신화지만, 그가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동북항일연군에서 싸운 유능한 지휘관으로 진짜임을 지적하였다."
『북조선』의 제2장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읽으면서 과거 우리의 반공교육이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은 사실대로 인정하고 나서 그 이후의 행적을 비판했더라면, 더욱 효과적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것이 민족적 정통성 면에서 꿀릴 수밖에 없는 일본 관동군 장교를 지낸 권력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부당한 건 두말할 나위 없지만, 독립투쟁의 이력이 김일성의 반세기에 걸친 장기집권을 정당화할 순 없다. 더구나 북한 당국이 내세우는 김일성의 만주항일전쟁의 전과는 침소봉대한 기색이 역력하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공격은 '보스턴 대학살'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인들이 다섯 명밖에 희생되지 않은 사건을 대학살이라 칭한다면, 북한 당국은 다섯 명의 보천보 주재 일본 경관은 모두 도망가고 "업혀 있던 경관의 아이가 유탄에 맞아 죽은 것과 일본인 요릿집 주인이 살해된 것이 예외적인 죽음이었"던 해프닝을 탁월한 전과로 미화하는 셈이다. 와다 교수는 언론의 대대적 보도에 힘입어 보천보 전투가 널리 알려졌다고 말한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발행 정지를 당했던 『동아일보』의 속간에 즈음 해 사건이 터져 『동아일보』가 이를 크게 보도했다는 것이다.
와다 하루키는 김일성 부대가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백두산 밀영과 그 일대에서 훗날 발견된 김일성 찬양 구호가 새겨진 나무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백두산 밀영은 "혁명가극의 한 장면을 상연하는 야외세트" 정도로 간주하고, 나무의 구호는 명백히 새롭게 새겨진 것으로 여긴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김일성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부풀려져 신화가 되고 북한 사람들의 행동의 준거가 되었다. 특히 "김일성의 만주항일전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상, 이데올로기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이런 측면은 보천보 전투 30주년이 되는 1967년 극적으로 표출되었는데, 와다 하루키는 이 해에 "김일성이 유일한 사령관으로서 인민 전체가 만주파, 즉 유격대원이기를 요구하는" 유격대 국가 노선이 채택됐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이듬해 여러 차례의 유격대 남파 공작을 유격대 국가 노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다. 와다 하루키는 북한의 외교 전략 역시 유격대 국가의 틀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 북한의 벼량 끝 외교의 배경이 줄곧 궁금하던 차에 유격전의 성격을 띠었다고 해석하니 그럴 법하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대단히 실용주의적인 절충주의 문화"로 전제한 와다 하루키는, 이런 측면을 유교적 전통문화와 사회주의의 결합으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의 정치문화를 "훨씬 잡종적인 문화적 혼합물"로 본다. 사회 전반에는 소련 문화의 색채가 짙게 나타나지만, 주체사상탑은 미국의 워싱턴 기념탑을 본떴다. 국가를 인체에 비유하는 수령론에서는 플라톤과 유럽의 중세적인 정치문화의 흔적이 엿보이고, 수령?당?대중의 삼위일체론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스며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의 영향이다. 와다 하루키는 본문을 다음 같은 내용으로 맺고 있다.
"현재의 북조선은 전쟁 말기의 일본과 닮은 부분이 있다. 공장은 가동되지 않고 식량도 바닥난 상태에서 생필품이나 먹을 것을 찾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했고 모두가 하루하루 겨우 연명하면서 여자들 옷이라도 있으면 즉시 먹을 것으로 맞바꾸었다. …(중략)… 그러한 일본의 과거를 반추해 볼 때,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현재의 북조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일 것이라 생각된다."
천황 일가의 생일을 기리는 1939년 일본의 봉축 기념일 행사(134쪽)와 김일성 부자의 생일을 기념하는 1990년대 초 북한의 축일(152쪽)은 40여 년의 시차가 나는 두 사회의 유사점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일본과 한국에서 같은 해 출간된『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작과비평사, 1992년)은 아직까지도 북한지도집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일성과 만주파의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서이고,『한국전쟁』(창작과비평사, 1999년)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한국전쟁을 분석한 책이다.『역사로서의 사회주의』(창작과비평사, 1994년)는 러시아사 연구자로서 와다 하루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와다 하루키의 한글판 가운데『한국전쟁』만 여러 쇄를 찍었을 뿐, 다른 책들에 대한 국내 독자의 반응은 시원치 않다. 이른바 친북 세력이든, 아니면 반북 세력이든 북한의 실체적 진실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와다 하루키가 다른 학자들과 함께 엮은『군대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시민운동』(오름, 2001년)도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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