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탐구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성의 이해에 있다
- 과학사가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책들
"시인이며 수학자, 물리학자이면서 행정관리요 극작가, 철학자이자 과학과 문화와 인간에 대한 해설자이기도 하면서 시와 문학, 예술 비평가이자 생물학과 언어 그리고 사회과학도인 브로노프스키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정열을 기울여 왔다."
"시인이며 수학자, 물리학자이면서 행정관리요 극작가, 철학자이자 과학과 문화와 인간에 대한 해설자이기도 하면서 시와 문학, 예술 비평가이자 생물학과 언어 그리고 사회과학도인 브로노프스키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과 정열을 기울여 왔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1908∼1974)의 유고집『과학과 인간의 미래』(대원사, 1997년)를 편집한 피에로 E. 아리오티의 브로노프스키에 대한 평가다. 아리오티의 평가대로 브로노프스키는 인문과학에서 자연과학에 이르는 지식의 영역을 종횡무진했다. 아울러 브로노프스키는 시문학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직접 시를 썼고, 시론을 집필했으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를 다룬 연구서도 출간했다. 브로노프스키가 편집한 펭귄판 블레이크 시선집에는 브로노프스키의 뛰어난 서문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런데 6종의 브로노프스키 한글판만으로는 그의 팔방미인적 기질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지금까지 출간된 한글판들에서는 브로노프스키의 과학사가 또는 과학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과학과 인간가치』(이화여대출판부, 1994년)에서 브로노프스키는 과학을 "자연에 숨겨진 잠재력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인간의 지식을 계통적으로 조직화하는 작업으로 정의"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과학의 정의는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에도 부합한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정의된 과학은 기체 분자의 운동론으로부터 전화기나 현수교, 심지어 약용 치약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며, 추상적인 지식과 구체적인 활용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
브로노프스키가 설정한 이 책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 문명의 부분들이 통일적인 전체를 이룬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과학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또한 책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과학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는 것은 마치 눈을 뜬 채로 노예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브로노프스키의 지론이 담겨 있다. 브로노프스키가 우리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것은 오늘의 세계가 과학의 산물이고, 과학에 의해 추동 받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과학과 인간가치』에 담긴 내용은 브로노프스키가 1945년 11월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 나가사키의 참상을 직접 보고 받은 충격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 강연이 바탕이 된 세 편의 에세이에서 브로노프스키는 과학기술이 야기한 엄청난 파괴력에 대해 경각심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치닫진 않는다. 외려 그는 과학을 옹호한다. 『컴퓨터시대의 인간심리』(홍신문화사, 1991년)에 수록된 『과학의 공통감각(The Common Sense of Science)』에 실린 과학의 대차대조표는 과학을 옹호하는 브로노프스키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6년 동안의 전쟁(제2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에서는 독일의 폭탄?무인기 폭탄 및 로켓 폭탄 V2호에 의해 살해된 사람 수가 6만에 달했다… (중략) …나눗셈에 의해 계산한다면 5천만 인구에 대한 영향은 평균수명 1퍼센트의 10분에 1 가량 줄어들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2주간에 해당한다."
반면, "지난 백년 동안 영국에서 평균수명은 20년이나 연장되었다." 그러니까 브로노프스키가 펼치는 논지의 핵심은 과학의 대가로 늘어난 20년의 평균수명에서 2차 대전 시기 과학기술이 영국 국민에게 끼친 해악은 기껏해야 2주일의 평균 수명 단축이라는 얘기다. 『컴퓨터시대의 인간심리』에는 또 다른 단행본인 『인간의 아이덴티티The Identity of Man』도 실려 있다.
『The Identity of Man』은 『과학의 상식The Common Sense of Science』과 함께 '한 지붕 두 가족'이 되기에 앞서 이미 한글판이 나왔었다. 브로노프스키의 대표작인 이 책은 『나는 누구인가』(정우사, 1984년)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일찍 우리 독자와 만날 수 있었다. "인간의 확신의 위기"를 중심 주제로 잡은 이 책은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인간이란 다른 동물들이 살고 있는 것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소개된 브로노프스키의 책은 그의 주저라 할 수 있는 『The Ascent of Man』이다. 이 책은 두 번 번역되었다. 『인간 등정』(삼성문화재단, 1976년)이라는 제목의 첫번째 한글판은 브로노프스키 저서를 통틀어 최초 번역이라는 의의는 있지만, 문고판으로 나온 탓에 삽화를 싣지 못한 반 쪽자리 번역물이었다. 두 번째 한글판인『인간 등정의 발자취』(범양사출판부, 1985년)에서는 책의 바탕이 된 영국 BBC 방송 다큐멘터리의 자취를 화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브로노프스키가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노 매즐리시와 함께 지은『서양의 지적전통』의 한글판 또한 두 곳의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의 한글판은 출판사는 달라도 번역자는 한 사람이다. 홍성사(1980년)판을 토대로 학연사(1986년)에서 개정번역판을 냈다.『서양의 지적전통』은 르네상스에서 19세기 초까지 서양사상의 발전과정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부터 헤겔에 이르는 인물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정치나 철학 사상에 국한하지 않고 과학과 문화 방면까지 관심의 폭을 넓힌 것이 특징이다.
브로노프스키의 관심사는 다양했으나, 그에게는 일관된 지향점이 있었다.『과학과 인간의 미래』에서 브로노프스키는 자신이 행한 지적 작업의 연결고리를 다음같이 표현했다. "나의 꿈은 20세기를 위한 시종일관된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훌륭한 철학뿐만 아니라 훌륭한 과학조차도 인간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자연에 대한 이해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이며 자연 속에서의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거명한 브로노프스키 책의 한글판들은 서점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확실히 절판된 것은 『인간 등정』 과 『나는 누구인가』정도다. 나머지 책들은 절판 또는 품절 여부마저 불확실하다. 미움 받는 여인보다 잊혀진 여인이 더 불행하다지 않던가.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에 대한 이번 기획리뷰에는 잊혀진 과학사가이자 과학철학자인 브로노프스키를 재인식하자는 뜻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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