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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잘 보인다

E.H.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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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20세기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미술사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2002 장 프랑수아 밀레 특별전'이 3월 30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제4, 제5전시실에서는 '오귀스트 로댕-위대한 손' 전시회가 2월 26일까지 열린다. 나는 고급예술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지만, 이 두 대가의 그림과 조각은 직접 보고 싶다. 굳이, 음악과 미술의 대중적 친밀도를 비교한다면, 일반 대중이 느끼는 거리감은 미술보다는 음악이 더 멀어 보인다.

물론, 음반을 통해 누구나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허나, 여기서는 예술작품을 직접 향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급예술과 대중 사이의 거리감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예술품의 간접 체험에서는 음악과 미술이 별 차이가 없다. 명화 복제품은 클래식 CD 몇 장 살 돈으로 얼마든지 구입 가능하다. 하지만, 국내외 유명 교향악단의 연주회는 한번에 길어도 사나흘이 고작이다. 게다가 이들 음악회의 회원권은, 보통의 월급 생활자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비싸다. 이에 비해, 미술 전시회는 기간이 길고, 전시장 입장료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미술의 대중적 친화력은 IMF 구제금융기를 겪으면서도 입증되었다. 이 시기, 여타 분야와 마찬가지로 출판시장 또한 위축을 면치 못했으나, '아무개의 그림 읽어주기'류의 이른바 '미술 교양서'는 오히려 판매성장을 지속했다. 원색도판이 들어간 탓에 책값이 만만찮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책들은 꾸준히 팔려나갔다. 이 책들의 주된 구매자는 초유의 국가부도상태를 흡족해하며 'IMF 마냥 고(go)'를 읊조린 서울 강남의 졸부들이 아니라, 서민층과 중산층에 속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중산층과 서민이 큰 맘 먹고 비싼 그림책을 덥석 구입한 것은 팍팍한 일상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달래보려는 마음이 작용한 때문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서론이 길었다.

 세계적인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대표작 『서양미술사』 (예경, 1997년)는 5년 만에야 3쇄를 찍었다. 만만찮은 가격과 이 책의 주된 독자가 미술대 재학생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판매속도가 굼뜬 편은 아니다. 여기에는 평범한 미술 애호가의 구매가 적잖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양미술사』를 소장하고 있는 독자는 더 많다. 또 하나의 한글판이 있는 까닭이다.

다른 『서양미술사』(열화당, 1977년)는 20년에 걸쳐 20여 쇄를 찍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좀 문제가 있다. 무단복제를 한 것은 시대적 한계 손 쳐도, 본문의 도판을 한 편으로 몰아넣고 두 권으로 분책한 것은 원저서를 손상시킨 거나 다름없다. '예경'판에 수록된 제12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처음부터 미술의 역사를 글과 그림으로 서술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페이지를 뒤적이지 않고 논술된 도판을 펼쳐놓은 본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기획된 책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나온 '열화당' 판 13쇄의 간기에 역자 인지가 버젓이 붙어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참 염치도 없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서양미술사』의 유명한 첫문장이다. 그런데, 이것은 곰브리치가 맨 먼저 한 말이 아니다. 전거가 따로 있지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통해 일약 세계적인 명구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상식의 오류사전』 (경당) 저자들이 "종교는 아편이다" "노동자는 쇠사슬밖에 잃을 게 없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따위의 말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맨 먼저 한 것은 아니라고 전후사정을 밝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비평사)의 유홍준 교수가 널리 퍼뜨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미술 감상요령 역시 유 교수가 밝힌 바 있듯이, 다른 사람의 견해를 빌어 온 것이다. 역시 부질없지만 이에 관한 전후사정은 기 소르망의 『20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한국경제신문사)의 곰브리치 편에서도 파악된다. "적어도 미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지니고 있어야만 렘브란트 같은 화가의 자화상을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곰브리치가 『서양미술사』의 서론에서 지적한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보고싶은 것만 보인다'거나 '기대한 것만 보인다'는 예술작품 감상법이 성립할 수도 있다. 마치, 신문독자가 구독신문의 사설에서 자신의 의견과 같은 내용을 기다리듯이 말이다.

"어떤 사건이 생기면, 구독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마음에 품고는, '내일이면 내가 즐겨보는 신문 사설에서 볼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잠이 든다. 이제 논설위원에게는 구독자들의 생각을 갓 구워낸 빵처럼 만들어서 다음날 아침, 그들을 놀라게 해주는 일만 남았다."(발자크의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 (서해문집)에서)

『서양미술사』는 20여 개 국어로 번역돼 전세계적으로 100만 부가 팔린 미술사 개론서 및 입문서의 '지존'이다. 서문을 통해 곰브리치는 책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다."

목적에 걸맞은 평이한 서술은 이 책의 성가를 더욱 높여준다. 곰브리치는, 전문용어의 사용을 자제한 것을 행여 독자를 무시하는 처사로 받아들이진 말라고 당부한다. 전문용어를 구태여 쓰지 않은 그의 진정한 의도는 이렇다. "독자들을 일깨워주기보다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학술적인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구름 위에서 '우리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닐지."

전문용어를 제한한 것 말고도 곰브리치는 몇 개의 집필원칙을 더 세웠다. △도판으로 보여줄 수 없는 작품은 가급적 언급을 피한다. △책의 내용이 인명의 나열로 얼룩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 흥미 있는 작품은 배제한다. △내 임의로 도판을 선정하지 않는다. 이런 원칙들은 책에 그대로 드러나는데 로댕이나 밀레는 물론이고 곰브리치가 좋아하는 화가인 피사로에 대한 서술도 반 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곰브리치와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은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 주는 것』(민음사, 1997년)은 곰브리치의 삶과 사상의 이면에 관한 궁금증들을 속시원히 풀어준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곰브리치의 인격과 성품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케 한 자료는 『20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에 실린 짧은 인터뷰 글이 고작이었다.

미셸 푸코의 전기작가로도 유명한 디디에 에리봉과의 대담에서 드러나는 곰브리치의 모습은 위대한 사상가 그 자체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겸손하다. 역시 천재의 첫째 덕목은 겸손이다. 곰브리치가 직접 들려주는 삶의 이력 가운데 몇 가지는 꽤나 이채롭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가족 모두가 영국으로 이주한 곰브리치(그는 유태인이다)는 BBC방송에 일자리를 얻는다. 그의 일은 독일 라디오방송을 청취하는 일종의 정보 업무였다. 곰브리치는 히틀러의 죽음을 연합국에 처음으로 알린 것을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회고한다.

"윈스턴 처칠이 전세계에 히틀러의 죽음을 알리게 되었을 때 정말 기뻤지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독일 방송은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알린 뒤 장엄한 음악을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브루크너가 작곡했던 교향곡의 한 악장임을 알았습니다. 요원들은 내게 최대한 신속하게 이 방송을 청취하고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가능성을 수 페이지로 요약해 달라고 했지요. 그중 하나의 가능성으로 나는 '히틀러 사망' 그리고 다른 종이에는 '히틀러 항복' 등등으로 기재했지요. 스피커에서, '우리의 총통께서, 볼셰비즘과의 전투중에 쓰러지셨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그것이 적힌 종이를 가리켰고 이 소식은 즉각 전화로 다우닝 가에 통고되었습니다. 나는 메신저였던 셈이지요. 소름끼치는 추억이라고 하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내가 다루었던 사건 중에서는 가장 비중있는 것이었지요."

곰브리치의 이름 표기와 관련한 일화도 흥미롭다. '에른스트 한스 요제프 곰브리치'가 그의 풀 네임. 하지만 그는 'E.H. 곰브리치'라는 약칭을 고집하는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곰브리치가 펭귄출판사의 의뢰를 받고 집필한 풍자화에 관한 대중용 소책자를 스승인 정신분석학자 에른스트 크리스와의 공저로 발간하게 되었다. 실제로는 곰브리치가 혼자 쓴 것이었다. 아무튼 곰브리치는 그 책의 표지에 '에른스트'가 반복되는 것을 꺼려해 'E.H. Gombrich'라고 표기했고, 이후 그 표기가 그의 이름으로 통용돼 왔다.

 '곰브리치와의 대화'에는 곰브리치의 저서에 대한 흥미로운 뒷얘기가 잔뜩 들어 있다.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인『곰브리치 세계사』 (자작나무, 1997년)가 『서양미술사』보다 먼저 나온 책이라는 사실은, 『세계사』 한글판 감수자의 추천글에서도 살짝 언급되고 있지만("곰브리치는 『곰브리치 세계사』의 성공으로 출판사의 청탁을 받아 『서양미술사』를 썼던 것이다"), 곰브리치가 들려주는 『세계사』 에 얽힌 얘기는 더욱 흥미진진하다.

대학에서 5년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땄으나 곰브리치에게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그래도 대중강연 등을 하면서 일자리를 찾고자 노력하던 중, 알고 지내던 편집자에게서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 책의 번역을 청탁 받는다. 책을 읽어본 곰브리치는 몰지각하게 짜여진 책을 번역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직접 쓰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 한 장(章)을 쓰게 된 곰브리치는 6주 만에 한 권의 세계사 에세이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대담집에 나타난 『서양미술사』 관련 에피소드 또한 재미있다.

"우리는 책에 빈 페이지를 두지 않기로 했지요. 나는 디자이너와 같이 일했는데, 매우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 장을 오른쪽 페이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적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앞 장이 항상 왼쪽 페이지에서 끝나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12세기를 다룬 장이 바로 그 경우였지요. 그는 도판 하나를 더 골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집에 글루체스터의 대형 촛대 사진이 있는데, 그 도판을 여기 넣을 수 있을 텐데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가 가져 온 도판에 나는 몇 줄을 더 적어 이야기 속에 끼워 넣었지요. 책에 대한 첫번째 서평이 나왔을 때, 『타임즈 리터러리 서플먼트』에 게재된 익명의 기사에는 '글루체스터의 큰 촛대에 관한 논평이야말로 특히 주목되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지 뭡니까."

곰브리치가 『서양미술사』의 긴 해설편이라 자평하는 『예술과 환영』(열화당, 1989년)도 한글판이 있었지만, 절판되었다. 예의 무단복제 출간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국제 저작권 협약의 전면 시행을 앞두고, 이 책의 재고분을, 책을 펴낸 출판사의 다른 '불법 출판물'과 함께 대형서점 등지에서 50퍼센트 싸게 파는 할인판매 행사가 있었다. 나는 이 책을 그때 구입했는데, 미처 책을 장만하지 못한 독자를 위해 정식 계약을 체결한 새 한글판이 나왔으면 한다.

곰브리치는 『예술과 환영』의 부제목 '회화적 표현의 심리학적 연구'에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곰브리치가 이 책의 서론에서 제사(題詞)로 인용하고 있는 막스 J. 프리들랜더라는 사람의 주장은 더욱 귀기울일 만하다. "예술이란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어떤 과학적인 연구도 반드시 심리학이 되게 마련이다." 곰브리치는 "나는 결코 심리학의 전문가연한 적이 없"다고 겸양 어린 태도를 보이지만, 그는 미술사 연구와 정신분석학을 병행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곰브리치가 '아는 만큼 보인다' 예술감상론의 옹호자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아는 것'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미술에 관해서 속물 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서양미술사) 마찬가지로 '시대정신'이나 '민중의식' 같은 관념을 부정하고 회피하려 했지만, 곰브리치는 시대정신과 민중의식을 가장 잘 체현한 지극히 20세기적인 미술사가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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