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베트남전쟁에서 철수하고 많은 영화와 드라마, 문학작품이 쏟아졌습니다. 미국이 최초이자 유일하게 패배를 기록한 그 전쟁에 대해 기록한 작품이 참 많이 있지요. 이라크 전쟁도 미국이 승전을 선언하며 끝났다고는 하지만, 패전국들을 완전히 장악했던 양차 세계대전 후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한 묶음으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로 묶이는 저항세력의 반발은 잦아들지 않고 있습니다. 경로야 어찌됐건 간에 이라크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9.11 테러에 대한 작품도 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신속하게 대량생산되었습니다. 내전을 제외하고 미국으로서는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겪기로 전쟁에 가장 가까운 사건에 대해서 말입니다.
마이클 무어를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어준 것도 〈로저와 나〉나 〈볼링 포 콜럼바인〉이 아니라 9.11을 다룬 〈화씨 9/11〉이었습니다. 분노와 공포, 또 그것을 이용한 자극적인 초기 9.11 관련 작품들의 와중에서 빈 라덴과 부시 가문의 관계, 특히 가난한 청년들을 상대로 한 징병 실태와 전사자 유가족들의 비애를 집요하게 그리면서 크게 호응을 받았습니다. 세계의 패권을 미국이 쥐고 있는 이상, 전쟁의 참상을 알려 미국인들에 대한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이 작품의 몫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반면에 어찌됐든 미국의 입장에서 테러와 전쟁을 그린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 역시 있었습니다.
| 무슬림 FBI 요원이 위장 테러리스트로 등장한다. 〈슬리퍼 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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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0억 이상의 인구가 믿는 종교가 5년 전의 사건으로 거대 테러 집단으로 전락하는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될 만한 이슈에 대해서는 반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버 데어〉 같은 드라마는 미국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했고,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테러리스트의 관점”으로 그린 드라마라니 과연 관심이 가지 않기 어렵습니다. FBI 특수요원이자 독실한 이슬람교도 주인공을 내세운 쇼타임의 10부작 미니시리즈 〈슬리퍼 셀〉입니다.
알카이에다의 로스앤젤레스 점조직을 무대로 한 이 드라마는 아닌 게 아니라 테러를 진압하는 미국 정보요원들이나 군인들이 아니라 테러 조직원들이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그들은 이슬람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엄청난 규모의 테러를 준비하고 있지만,
〈24〉처럼 쉴 새 없이 테러 장면이 등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액션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고, 그보다는 테러를 준비하는 한편 이슬람 급진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의 면면을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제작진의 말대로 “진정한 신앙인”과 “테러리스트 광신도”들의 경계선이 어디서 만나고 갈라지는지 보여주려는 드라마입니다.
|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주인공 품새로 포즈를 취한다는 게 이 드라마의 의도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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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이 넘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단 한 가지 모습만으로, 일방적으로 그려져 왔다는 것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셈이지요. 다른 많은 작품이 변죽만 두드리고 있을 때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이 드라마의 포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슬람교도로 태어난 흑인 FBI 요원이 거물 테러리스트의 포섭을 받으려는 공작과 점조직 잠입에 성공하면서부터 드라마는 시작됩니다. 이슬람 하면 아랍인들의 얼굴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지만, 말콤 엑스가 있거니와 미국 내에는 이슬람교도의 상당수를 흑인이 채우고 있습니다. 원칙상 인종을 초월해야 마땅한 것이 종교인데, 순혈주의를 들먹거리는 아랍인 이슬람교도를 그리는 드라마의 장면을 보면, 주인공을 흑인으로 내세운 이유의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나 상업광고가 없이 60분을 거의 다 채우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볼수록 늘어가는 것은 막연한 기다림 뿐인 것은 왜일까요?
테러리스트의 관점이라는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홍보문구였다고 쳐도,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거니 하는 “작은” 기대가 채워졌다고는 선뜻 말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봐도 독실하고 올바르게 신과 예언자의 말을 따르고 실천하는 주인공과 신의 이름으로는 그 무엇도 용납할 수 있으며 하급 조직원으로서 묻지 마 명령에도 군소리 없이 따르는 다른 조직원들과의 구도부터가 그렇습니다. 주인공 FBI 스파이 다윈을 제외하고, 대장 한 명을 비롯한 네 명의 조직원들은 그야말로 급진주의자들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미군에서 쫓겨나 증오심만을 안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WASP, 모로코 출신의 아내가 있다(이것도 분명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에피소드 중에 등장합니다)는 것밖에는 개인적인 역사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프랑스인이 있습니다. 여하튼 두 명 다 이유를 찾기 힘든 치기 어린 반항아 이상으로는 그려지지 않습니다.
| 다윈과 그가 사랑했던 여인 게일... 왠지 〈CSI〉의 워릭과 세라 짝퉁 분위기가 나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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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행한 개인사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뚤어진 반항심에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고 개종하여 테러리스트가 된 백인들은 현실에서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새로운 관점에서 테러와 이슬람 문제를 접근해 보겠다는 제작의도에 비춰보면 비중은 과중한데다 캐릭터 설명은 불충분한 인물이 그들입니다. 가족이 세르비아인들에게 몰살당한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 정도나 그나마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설정입니다. 그런 그들이 만날 때마다 나누는 인사는 늘 평화가 함께 하기를,입니다. 그리고 그 인사를 실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미국이며 그들은 미국에 대한 결사항전을 다짐합니다.
그런 급진주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달리 묘사하고 형상화할 관점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연들이라고 내세웠는데, 그들이 벌이는 행동의 동기는 비슷한 작품들에서보다 얼마나 더 폭로가 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신실한 평화주의자인 주인공 다윈이 탄압받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항의로 무력행사를 주장하는 다른 조직원들의 신념에 내면적인 갈등을 일으킬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가 보는 것은 그들이 죽이거나 그들 때문에 죽는 사람들, 즉 자신의 FBI 동료나 테러를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학자, 미국 땅에서 자유연애를 하는 틴에이저 여자아이뿐이니까요. 서로밖에는 만나는 사람이 없거니와, 다윈이 자신들과는 생각이 전혀 다른 FBI 위장요원이라는 것을 꿈에서도 모르는 다른 조직원들이 자신들이 품은 대의에 인간적인 갈등을 겪을 게제는 또 얼마나 될까요.
서로 알건 모르건 간에 단호하게 양극단을 달려가는 주인공들에게서 섬세하고 드라마틱한 갈등은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꽤 차분한 매력의 주인공 배우가 안타깝게 여겨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또 그와 백인 카톨릭 여자의 애정전선도 흐지부지합니다. 백화점처럼 다른 것은 잔뜩 늘어놓았으되, 그 사이의 긴장과 연결고리의 역동을 발견하기 어려우니, 만든 사람이 이러저러한 의도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과 작품에 그것이 드러나느냐 하는 문제는 역시 별개임을 절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