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여자가 정치를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여자 정치가는 남자 정치가와는 무언가가 달라야 할까? 정치판에서 여자가 여자로서의 플레이를 해서 통할 수 있을까? 장관이나 의원이나 총리 등이 된 여자들은 어떤 식의 정치로 그런 지위를 얻게 된 것일까? 복잡하게 생각하려면 한없이 복잡하지만, 그냥 단순화시켜 버리면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 정치를 대하는 개인의 태도 문제이지, 성별 구분은 결정적으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 만약 미국에서 여자 대통령이 나온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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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직업여성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일을 잘하고 업무에서 성과를 올리는 것임은 남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령 여자 언론인이 경력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남자 언론인과 꼭 마찬가지로 좋은 취재거리를 찾아내서 많은 사람의 호응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사를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분명한 것은 정치하는 여자에 대한 바깥의 시선입니다. 감시와 차별이 되었건, 아니면 정말로 정치적인 이유에서의 특혜가 되었건 간에, 그 다른 시선이 여자 정치가들에게 다른 기대와 요구를 하게 되는 요인이 됩니다.
미국의 코미디언들은 오늘도 빌 클린턴을 조롱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빌 클린턴의 정치는 힐러리 클린턴의 정치이며, 힐러리 클린턴이 없었다면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얘기는 거의 국민적 합의 수준으로 되어 있지요. 그 얼굴 마담 뒤에 버티고 있는 여주인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조롱은 더 집요하고 가열찹니다. 빌 클린턴의 호색과 얼굴 마담 역할을 그토록 비웃으면서도, 힐러리 클린턴에 대해서는 영부인 집무실 안으로만 자신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았다며, 대가 세다며, 지치지도 않고 그것에 대한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는 코미디의 소재가 됩니다. 전통적인 남자 대통령과 전통적인 영부인에 관해서는 당사자가 희화화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관계가 코미디의 소재가 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여자 대통령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영부군”이 당할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지나 데이비스 주연의 〈커맨더 인 치프〉의 퍼스트 젠틀맨이 백악관에 들어갔을 때 겪는 일도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죽었을 때 그 자리를 물려받는 서열이 부통령, 하원의장 순으로 갑니다. 극중의 부통령이었던 지나 데이비스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대통령의 뒤를 이어 백악관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그때부터 각료나 전 대통령 보좌진, 그리고 자신이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만을 위해 40년에 가까운 의원 생활을 해온 하원의장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무소속의 이 여자 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것은 검사 출신의 이 대학총장의 인기가 워낙 높았기 때문입니다. 불투명한 당선을 확실히 해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대통령 자신도 이 여자 덕분에 선거에서 이긴 것이지요.
지나 데이비스가 분한 맥킨지 앨런 부통령은 대통령직 승계를 강행하고, 이때부터 주변 세력의 갖은 농간과 협잡에 맞서 이 미국 최초 여자 대통령의 미션 임파서블은 시작됩니다. 그중에 영부군 문제도 발목을 잡는 요소가 됩니다. 영부군 자신이 마음을 곱게 먹고 내조에만 전념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를 않으니까요. 하하하, 남자가 핑크색으로 온통 치장된 영부인 집무실에 벨 좋게 잘도 앉아 있구나, 하며 나이트 토크 쇼의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백악관의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케빈 패더라인이 되는 셈이라고 할까요? 힐러리 클린턴이 적극적으로 빌 클린턴의 보좌관 역할을 할 때는 국정 간섭이다, 암탉이 운다, 하는 식으로 나오다가 아무 직책 없는 퍼스트 젠틀맨도 눈감아줄 대상은 못 됩니다. 물론 이것은 드라마, 즉 픽션 속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여자 대통령이 나온다고 해도 드라마 속 상황과 별로 다른 상황이 전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자 대통령 역의 지나 데이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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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이 뉴욕 주 상원의원이 2008년 미국 대권을 노리고 있음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데 오기까지 미국은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습이 됐건, 무슨 다른 이유가 됐건 간에 인도네시아 같은 이슬람 대국을 비롯한 남부 아시아에서도 여자 대통령이 이미 나왔고, 영국이나 뉴질랜드도 여자 총리가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이제까지 여자 부통령조차 없었습니다. 보수성에 일종의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역사 짧은 미국에서 변화가 더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백인 여자 대통령이 선출될 수도 있는 가능성까지 이만큼이 걸렸다면, 유색인종이 대통령이 될 때는 언제가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당에 소속되어 당과 함께 움직여서는 여자 대통령이라는 특수성을 제대로 그리는 것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해서인지, 맥킨지 앨런은 최초의 무소속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양당 구조가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한 미국의 현실에서는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소속 여자 대통령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그리는 〈커맨더 인 치프〉의 정치 판타지는 여자 군통수권자의 현실과 이상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은 듯 산만해지고 맙니다. 처음에는 대통령으로서 여자이기 때문에 겪는 곤경에 초점을 맞추면서 지저분한 정치 협잡을 그리다가, 그런 뻔함에서 벗어나 이상과 능력을 고루 갖춘 그녀의 정책과 그 과정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초점을 옮기는데요. 그 후반부에서는 또 여자가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굳이 여자가 대통령이라는 특색을 내세울 만한 요소가 사라지면서, 이것도 저것도 손에서 다 놓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 하원의장 네이선 템플펀 역의 도널드 서덜랜드, 의외로 웃는 게 아주 귀여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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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서덜랜드가 맡은 하원의장 네이선 템플턴은 앨런 대통령의 정적으로서 앨런을 파멸시키기 위해 온갖 비열한 짓을 일삼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를 위한 일이라며 비장한 애국심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E-Ring〉을 훌쩍 뛰어넘는 낯 뜨거운 느낌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웨스트 윙〉의 바틀렛보다 훨씬 이상주의적인 대통령, 〈웨스트 윙〉의 공화당원들보다 훨씬 더 교활한 정치꾼이 주몽-대소의 라이벌 구도를 연상시키면서 대치하는데, 선인인 대통령이 늘 이기는 과정, 혹은 왜 그렇게 둘의 라이벌 구도가 부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변변치 않으면서 시청률에서도 실패를 맛봅니다.
제작진과 ABC 측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의 대권 지원 의도를 숨기지 못했다며 시작부터 논란이 되었던 〈커맨더 인 치프〉의 여자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과 이상을 그리겠다는 포부는 이제 다음 시즌의 전파를 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골든 글로브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지나 데이비스와 조연 후보에 올랐던 도널드 서덜랜드의 카리스마와 연기는 즐겁게 보았지만 말입니다. 특히 〈바늘구멍〉에서 보여준 사악함을 대표로 해서,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영화들로 필모그래피를 채워왔던 도널드 서덜랜드가 쉼 없이 모략을 쏟아내는 와중에 가끔씩 보여주는 천진한 웃음은 참 일품이었답니다.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시즌이 끝난 후에 더 이상 제작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났기 때문인지, 제작진은 2시간짜리 영화를 따로 만들겠다고 발표했지만, 캐스트들의 사정상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서피스〉에 이어서 이런 일은 드라마 팬으로서는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인데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