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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스타터의 저력을 과시하다 -〈미디엄〉

쏟아지는 영매?심령 드라마들 가운데 가장 선전 중인 드라마가 NBC의 〈미디엄〉입니다. 2005년 1월에 첫 방송을 하기 전에 NBC에서 줄기차게 틀어주던 광고방송을 보았을 때는 어쩐지 〈엑소시스트〉 과의 무섭기만 한 드라마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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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57퍼센트는 데자뷰를 경험했다고 하고, 또 57퍼센트가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으며, 53퍼센트는 자신의 별자리 운세를 정기적으로 읽으며, 15퍼센트는 정기적으로 정신과 의사를 만난다고 하는 통계를 어디서인가 읽었습니다. 정신적이고 심령적인 부분에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지요. 그러니 〈수퍼내추럴〉이나 〈고스트 위스퍼러〉 〈트루 콜링〉 〈데드 존〉 등 영매나 심령술에 관한 드라마가 물밀 듯이 밀려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과학 수사물들에 비하면 아직 인기는 떨어집니다만, 영매 드라마에 대한 시도는 줄어들 줄을 몰라서 TV 드라마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요. 과학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인간의 정신이나 초자연적인 현상 같은 영역에 관한 관심은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쏟아지는 영매?심령 드라마들 가운데 가장 선전 중인 드라마가 NBC의 〈미디엄〉입니다. 2005년 1월에 첫 방송을 하기 전에 NBC에서 줄기차게 틀어주던 광고방송을 보았을 때는 어쩐지 〈엑소시스트〉 과의 무섭기만 한 드라마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삐걱대는 2층 계단에 서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졌지요. 죽은 사람들, 그것도 원을 품고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늘 조우해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라니, 과연 좀 으스스하기도 했습니다. 허나 시리즈 프리미어가 방영되었을 때 처음 등장했던 것은 노란 조명의 따뜻한 분위기가 나는 집안에서 복닥거리고 사는 한 가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영매는 더없이 다정한 남편에, 사랑스러운 세 딸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매 드라마 <미디엄>
신기를 내려 받았다고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 낳아 알콩달콩 살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발목까지 내려오는 히피 느낌의 홈드레스와 부적처럼 주렁주렁 장신구를 달고 있기는커녕, 아침이면 아이들 아침 먹이고 학교 보내느라 한바탕 북새통을 치르는 여염집 엄마의 모습은 영매로서는 일견 비범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자들과 미래를 보여주는 끔찍한 비전으로 머릿속이 늘 시끄러울 텐데도 난리통의 일상을 잘도 꾸려 나가며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드라마만의 설정이 아닙니다. 〈미디엄〉은 실제의 인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인물의 이름과 가족 구성까지 똑같이 가져다 쓰고 있지요.

앨리슨 드부아라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매 중 하나가 이 드라마 주인공의 모델입니다. 남편 이름이 조 드부아이며, 직업이 항공우주 공학자, 세 딸을 두고 있는 것, 심지어 거주지가 애리조나 주 피닉스인 것까지 같습니다. 실제 인물 앨리슨 드부아도 수사 기관을 도와 일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모로 똑같이 빌려왔지만, 실제 앨리슨 드부아가 경험한 것과 드라마 속의 이야기는 많이 다르다고 하지요.

애리조나, 하니까 영적 명상의 성지 세도나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에 스물 한 개가 있다는 보텍스라는 에너지장이 이 작은 도시 한 곳에만 다섯 개가 집중적으로 있다고 하여 유별나게 신비롭고 영적인 기운이 넘쳐나는 곳이라고 하지요. 영적인 명상과 신비주의를 좇는 사람들이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세도나가 바로 애리조나에 있습니다. 그 기운이 애리조나 태생의 앨리슨 드부아에게도 미쳤음인지, 그녀는 꿈속에서 범죄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현실의 비전 속에서도 죽은 사람들을 만나거나,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만날 때면 그 사람의 과거나 행적이 플래시가 터지듯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명문 배우 집안 출신이죠. 패트리샤 아퀘트
어렸을 때부터 나타난 그러한 능력 때문에 고뇌를 안고 살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앨리슨은 자신의 능력을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받아들이고서 좋은 일에 쓰기로 마음먹고 애리조나 주 검찰청에 들어가서 사건 해결을 돕습니다. 앨리슨 역할에는 〈트루 로맨스〉나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선보인 독특한 분위기 후에 별 달리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이지 못했던 패트리샤 아퀘트가 맡아서 호연하고 있습니다. 〈미디엄〉이 가을 시즌이 아닌 겨울의 중반부부터 시작하여 불리한 점을 안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2005년 에미상 여우주연상 수상이라는 성과는 쾌거에 가깝습니다.

사실 시즌 1에서는 앨리슨 드부아의 캐릭터에 불만의 목소리를 쏟아내는 팬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험한 꿈에 시달리고 흉악범죄 해결을 업으로 삼고 있다지만, 드라마 주인공 치고는 너무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이기적이다 싶은 모습까지 보이거든요. 드라마 밖 실제 인간이 드러낼 법한 허물을 너무 서슴없이 드러내는 것이 아닌지 싶어 괜히 보는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에 비해 남편 조 드부아는 대단합니다. 자다가 악몽에 시도 때도 없이 깨는 아내를 다독여주고, 온갖 신경질을 다 받아주며, 가사 일도 완벽하게 분담하면서 지상에는 없을 것만 같은 남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겸손한 헤어스타일에 너무 착하기만 해서 끄는 힘이 좀 약한 것 같던 조 드부아는 시즌 2에 오면서 비중도 좀더 높아지고, 선량하고 현명한 남편과 아빠로서의 매력을 한껏 어필했습니다. 조 드부아뿐 아니라, 〈미디엄〉이라는 드라마 자체가 시즌 2에서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재미를 선사했지요. 시즌 1에서는 영매가 주인공이어도 어쨌거나 수사물인 이 드라마가 수사 팀 이야기와 주인공 가족 이야기가 어정쩡하게 얽히며 에피소드를 하나 다 보고 났을 때마다 하다 만 이야기를 본 듯한 찜찜함이 남았었거든요. 그 와중에도 에피소드마다의 편차가 크게 없이 아주 완만하게 상승하며 재미있어지는 점은 있었습니다. 사실 시즌 1 파일럿부터 확 휘어잡으며 구성도 탄탄하고 재미도 가득 안겨주는 드라마는 그렇게 흔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미디엄〉은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이고, 슬로우 스타터를 그다지 용인하지 않는 분위기의 할리우드에서 더 이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아서 그 기회에 보답한 경우입니다.

빨간 헬멧 꼬마 아가씨 브리짓 비중을 높여주세요..!

시즌 2에 오면 가족 이야기가 좀더 적극적으로 등장하면서 극의 흥미를 결정적으로 끌어 올립니다. 부부간의 갈등과 화해 과정도 그렇지만, 세 딸의 감초 역할도 아주 야무지지요. 영매가 주인공인 수사물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더 중요한 조연은 앨리슨 드부아의 가족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습니다. 독특한 재능과, 다른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없는 눈이 있는 사람이 자신이 놀아야 할 것 같은 물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엮어 나가는 이야기는 참신한 느낌을 줍니다. 엄마의 영매 재능을 물려받은 딸들, 그중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찌 하는 짓과 생김새가 〈보스턴 리갈〉의 앨런과 오버랩되기도 하는 둘째 딸 브리짓의 천연덕스러움은 이 드라마에 유머 감각까지 첨가해 주었습니다. 비중이 조연이고 큰 딸에 비해서 학교 일상도 제한적이라 설정상 많이 등장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빨간 헬멧 꼬마 아가씨 브리짓의 대사가 〈미디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대사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제대로 만들어진 설정이라고 주장하고 싶군요. 포기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보람을 안겨준 드라마, 〈미디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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