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생폼사에서 새로운 도약으로 - 〈CSI; 마이애미〉
대기만성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행운이지만, 착실하게 한 단계씩 올라가 이제는 절정에 이른 저력과 도약에 탄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작품이 〈CSI: 마이애미〉입니다.
tv.com이라고, 즐겨찾기 해놓은 웹 사이트가 있습니다. 미국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 등 TV에서 방영되는 모든 쇼를 망라해서 소개하고, 팬들의 의견을 담기도 하는 사이트입니다. 얼마 전에 “CSI: Miami”를 검색어로 입력해서,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캐스팅 소개 등등은 지나치고, 스크롤을 더 끌어서 시청자의 답글을 읽다 보니, “My New Best Friend"라는 제목이 확 눈에 띄었지요. 뜻 맞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이 와락 앞섰습니다. 그랬습니다. 지난 세 시즌 동안 보면서, 〈CSI〉의 스핀오프(spin-off)로서 스케일은 〈CSI〉와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성긴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못내 떨쳐내지 못했는데, 이번 5월에 끝난 시즌 4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거든요.
10점 만점인 tv.com의 시청자 평점에서는 현재 8.6점을 받고 있는데 그다지 후한 평가는 아닙니다. 그것도 평이하게 받은 점수도 아니고, 시청자 각자가 매긴 평점마다 극과 극을 달린 끝에 나온 점수입니다. 0.1점, 1점, 2점을 매긴 사람 중에는 내가 이걸 왜 보고 앉았는지 모르겠다고 써놓은 이들도 꽤 됩니다. 글쎄, 〈CSI: 마이애미〉를 보다 보면, 그런 일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워낙 큰 성공을 거둔 〈CSI〉의 후광을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뻥뻥 터뜨리는 액션 때문인지 이 후발 주자에게 어느새 진득하게 정이 생겨나 새 시즌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찾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냉철하지만 유기적인 〈CSI〉의 동료 관계 묘사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탐탁지 않고, 그러다 보니 캐릭터에 동화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보스인 호레이쇼 반장은 어찌나 ‘폼생폼사’의 대가인지, 에피소드마다 오프닝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바로 전에 어김없이 선글라스를 걸치며 꼭 한 마디씩 비장하게 내던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지요. 고개를 거의 수평으로 기울여 사람 눈을 쳐다보지 않고 말하는 품도 마찬가지였고요. 게다가 용의자에게 침 세례나 받으며, 그다지 카리스마의 기운을 내뿜지 못하는 것입니다. 헌데 낮게 깔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네 시즌이 이어지는 동안 거의 한 톤도 올라가는 법이 없었는데, 그 동정심 많고 선하기만 한 호레이쇼 반장에게 가랑비에 옷 젖듯 어느새 익숙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과장된 비장함에 차가운 구석은 없이 곱기만 한 심성이 수사물 보스 이미지로는 오히려 신선해서인지, 마이애미 데이드 카운티 과학수사대 반장인 호레이쇼는 컬트적인 팬층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거의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감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시청자를 당혹하게 하는 등 드라마 자체가 의도하지 않은 웃음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연기는 마냥 비장하지만, 그 모습에 관객은 때로 웃게 되는 게 마치 홍콩 누아르의 분위기와도 비슷하군요. 바닥은 늘 축축하게 젖어 있고 가스등만 비추는 골목길이나 황량한 창고와는 거리가 먼, 눈부신 햇살 아래의 마이애미가 무대인 것은 다르지만요.
그냥 간단하게 "H"라고도 불리는 호레이쇼 반장은 폭발물 전문가입니다. 폭발물 전문가를 보스로 내세운 바에야, 액션을 강조하겠다는 의도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마이애미의 CSI들은 범죄가 이미 일어난 곳에 가서 법의학 조사를 벌이는 것만큼이나 현장에서 범인들과 맞서며 위험에 빠지는 상황도 많습니다. 미국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가장 가까운 곳에 맞닿아 있는 마이애미는 갱들과 마약 카르텔의 온상이고, 그런 만큼 거물급 범인과 조직이 유달리 많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이애미가 어떤 도시입니까? 〈닙턱〉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등장하듯 미국 전역에서 불법 성형수술이 가장 빈번하게 자행되는 곳이기도 하며, 사시사철 뜨거운 햇살이 미국 내 뭉칫돈과 유혹을 불러들이는, 그 자체로 마약 같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악어와 상어로 대표되는 늪지대와 바다의 공포는 마이애미의 범죄 스케일을 한층 강하게 해주며, 게다가 다른 CSI 시리즈에 비해서 유달리 정의감에 불타고 스타일에 목숨 거는 귀여운 호레이쇼 반장의 캐릭터 설정상, 〈CSI: 마이애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폼생폼사’로 시청자들과 손을 맞잡고 달려나갑니다. 자, 그 ‘폼’을 완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험머 H2입니다. 털털거리는 포드 SUV를 타고 다니는 〈CSI〉의 대원들은 누리지 못하는 호사지요. 기름을 길바닥에 뿌리고 다닌다는 험머를 경찰 공무원이 타고 다니다니… 마이애미 재정이 풍족한 건지, 스케일을 강조한 드라마 설정상 등장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보는 눈은 더없이 즐겁습니다. 이왕 나가는 김에 H1으로 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요.
시즌 4에서는 단편의 에피소드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지능적 연쇄살인범과 거대 조직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스케일을 한껏 키웁니다. H 반장은 아예 실험실 활동은 접은 듯 밖으로만 나돌고요. 자극과 규모는 한층 커졌으면서도, 극의 긴장감은 오히려 훨씬 섬세해진 것이 시즌 4의 환골탈태와 대성공을 이끈 힘이었습니다. 호레이쇼에게 이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버린 미결 사건과 눈에 띄는 성과 때문에 도리어 내외부적으로 집중적인 공격을 받으며 흔들리는 호레이쇼의 팀, 팀 내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스파이도 단발 사건을 나열하느라 늘어질 수도 있는 극을 채찍질했습니다.
대원인 에릭 델코(라틴 아메리카계의 준수한 외모 덕분에 누군가에게 ‘에이 로드’라고 불리는데, 델코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이 아담 로드리게스여서, 아닌 게 아니라 에이 로드라고 불리는 것도 틀린 경우는 아니겠습니다)가 가정사로 의심받을 행동을 하면서 전개되는 갈등, 새로 들어온 대원 간의 갈등과 정말로 어색하고 정감 있는 유머 감각, 대원의 부상 등으로도 절정의 화학 작용을 일으킨 시즌이었답니다. 그 모든 것을 부지런히 풀어나가는 가운데, 호레이쇼 반장의 큰 비밀 하나를 남겨두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했고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센스라기보다는 클리프 행어의 고통이지만 말입니다. 대기만성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행운이지만, 착실하게 한 단계씩 올라가 이제는 절정에 이른 저력과 도약에 탄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작품이 〈CSI: 마이애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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