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을 가진 로마 - 〈Rome〉
도대체 2000년도 더 전의 로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살았기에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을 되뇌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로마에 관해 십수 권의 책을 쓰고도 할 말이 남은 듯 망설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소박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대중문화가 총애해 마지않는 소재는 꽤 여럿 있습니다. 특정한 지역, 특정한 사건, 특정한 전쟁, 특정한 인물 등은 지치지도 않고 영화, 드라마, 소설 속에서 환생을 거듭합니다. 그중에서도 로마만큼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그토록 많이 되풀이되고 변주된 소재가 있을까요? 도대체 2000년도 더 전의 로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살았기에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름을 되뇌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로마에 관해 십수 권의 책을 쓰고도 할 말이 남은 듯 망설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소박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온갖 개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보태지 않아도, 아니, 어쩌면 있는 사실을 최대한 가깝게 그려야만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장 크게 살릴 수 있는 소재가 로마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로마를 소재로 한 저술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면, 지구상에 로마를 다룬 작품이 이제껏 수만 편이 나왔겠지만, 앞으로 수만 편이 더 나온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추측에 또 한번 힘을 보태준 작품이 영국 BBC와 미국 최대 유료 케이블 채널인 HBO가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이어 다시 한 번 손을 맞잡은 〈Rome〉입니다.
〈Rome〉의 첫 번째 시즌은, 그 자신은 끝내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으나, 현왕이 되기를 꿈꾸며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향하는 다리를 놓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를 그립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시저라기보다는 시저 휘하에서 갈리아 정벌을 완성하며 가장 큰 무훈을 세운 13군단의 병사 루시우스 보리누스와 타이투스 풀로이지요.
사실 중앙이 아닌 변방의 이름 석 자뿐인 인물로 야사를 새롭게 해석해 내는 것이 요즘 사극 혹은 시대극의 트렌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훈은 대단하나, 로마의 일개 시민인 보리누스와 풀로를 더블 버디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 민초를 중시하려는 제작의도가 있었다는 과한 해석을 굳이 씌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시저나 아우구스투스같이 역사를 이어오며 면면히 이름을 지켜온 인물들을 중심에 내세우자면, 무언가 정통성에 근거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드라마를 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시청자들에게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까요?
어쨌거나 오늘을 사는 내 이웃과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으면, 역사적 지식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몰두할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요. 또 사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름을 너무 많이 들어서 왠지 그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볼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사태에 직면하기보다는, 어쩌다가 보니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의 이야기는 꽤 큰 안전함을 보장해 주기도 하지요.
〈대장금〉, 〈왕의 남자〉에서부터 〈글래디에이터〉, 심지어는 〈반지의 제왕〉까지를 관통하는 뻔하디 뻔한 트렌드를 〈Rome〉 또한 별다른 의심 없이 차용했지만, 자, 누누이 말하지만 사람들이 ‘좋아라’하며 열광하는 대중문화 코드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섣불리 상식을 일방적으로 뛰어 넘는 시도는 시청자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않는 이상, 별다른 소득 없이 한 시대의 실험으로 잊혀갈 뿐입니다.
하지만 대중성과 실험성의 팽팽한 긴장감 사이의 접점을 포착해 낸다는 점에서 HBO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Rome〉도 예외는 아닙니다. 역사 속 실존인물인 시저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폼페이우스 등이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정작 로마의 정통성을 상대하는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인 야사는 보리누스와 풀로의 행동거지를 통해 창출됩니다.
로마 시대의 뇌수술, 귀족들의 막 나가는 생활, 살육의 전투장, 로마의 법정 시스템, 마피아의 원조라고나 할 수 있는 로마의 암흑가, 고급 사창가, 현대의 의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원로원 등에서부터 폼페이우스의 죽음 및 클레오파트라와 시저의 관계에까지 로마의 과거를 상상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드라마적 재현이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사방팔방에는 늘 보리누스와 풀로의 그림자가 아주 지난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원칙과 도리와 가슴을 모두 품은 보리누스와 그리스인 조르바 풍취가 물씬 풍기는 풀로 콤비를 통해서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가 탄생합니다. 드라마 곳곳에 포진된 둘의 대화를 감상하는 것도 아주 별미이지요.
아, 우선 지난번에 〈닙턱〉을 소개해 드리면서, HBO와 같은 유료 케이블 채널을 제외한 채널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도 높은 노출증(그리고 잔혹성)을 표현했다는 말을 했습니다만, 이번 참에 그 말은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잔혹성이나 선정성에서 HBO가 제외되어야 했던 이유는 바로 〈Rome〉과 같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무한 경지의 표현의 자유 때문입니다. 〈Rome〉의 잔혹하고 성적으로 적나라한 영상은 〈닙턱〉의 그것과도 비교 자체가 힘들 정도로 리얼하면서도 드라마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몇 해를 미국에서 보낼 수 있었던 덕분에 현지 케이블 방송을 통해 〈Rome〉을 무삭제로 볼 수 있었지만, 안 그래도 강렬한 영국 현지인 발음을 고어체로 말해 대는 통에 시청각적인 신경을 한군데로 집중해야 원활한 감상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괴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려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게 〈Rome〉이었답니다.
〈Rome〉에서 표현된 장면은 작정하고 잔혹하며 노골적으로 성적인 장면을 보여주려는 피 튀기는 B급 공포영화와도 자웅을 겨룰 만한 수위입니다. 아마 가능한 한 등급을 확대해서 상영하려는 주류영화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5년 에미상 사회를 보았던 엘렌 드 제너러스는, HBO의 드라마가 상을 많이 타는 이유는 욕설과 발가벗은 사람들이 마음껏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지요.
여하튼 그 시절 로마는 최상층의 귀족들에게조차 신을 받들어 모시는 일에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는 터부라는 것이 없었던 듯합니다. 퇴폐와 문란이라는 단어에 대한 현대의 정의는 그 시절에는 유명무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을 침해하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를 힘으로 처단하는 모습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끔찍한 살육과 막 나가는 성적 관계를 보면서(국내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할 때 모자이크 처리하느라 팔았을 품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여기저기 그어놓은 선 속에서 안락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쩐지 무언가 잃어버린 듯도 하고, 손해를 본 듯도 하고 오늘날의 인생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졌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란 말입니다.
그런 장면을 보며, 폭력성이나 동물적 본성 등 오늘날의 사전에 담겨 있는 단어들을 갖다 붙이며 미주알고주알 캐는 것도 꽤 무의미한 짓이겠지요. 아마 그것이 로마 이야기, 저 옛날의 이야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열광하는 한 이유이겠고, 〈Rome〉이라는 드라마가 표방하는 지독할 정도의 사실성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눈 뜨고는 차마 보기 어려운 잔혹한 장면, 눈 감고 소리만 듣고 있어도 곤혹스러운 장면과 분방한 성애 장면에 비해, 시저가 이룬 전쟁의 대서사시는 크게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 〈Rome〉입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같은 제작팀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장대한 스케일을 기대한 시청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Rome〉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투 장면을 장중한 스케일로 그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와 인간관계를 거의 아기자기하다 싶을 만큼 그리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시저의 비중은 가시적으로 크지 않지만, 타락한 공화주의와 전성기의 정점을 찍고 내려올 일만 남은 로마를 되살리고자 하는 현명하고 강력한 지도자, 제도적으로는 제정을 꿈꾸는 시저의 모습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미국 대중문화가 일종의 코드로서 반복하고 있는 장치, 그러니까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둘 다를 조롱거리로 삼는 모습이 이 드라마에서도 등장합니다.
얼마나 먹기 좋게 보이는 떡이든, 얼마나 명분이 그럴싸하든, 시스템이란 결국 밥그릇의 문제(가령 원로의원들이 로마 시민들로부터 천정부지의 인기를 누리는 시저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일 수밖에 없고, 밥그릇이 문제가 되면 배는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냉소를 표현하고 있는 셈이지요.
공화정이라는 당시 로마의 명목적인 이상과, 타락해 가는 로마를 다시 일으키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지도자 사이에서 용단을 내려야 하는 원칙주의자 보리누스, 단순무지함으로 천진한 철학을 늘어놓는 풀로가 살아 숨 쉬던 그 시절 로마인 이야기는 현재에 통용되는 백만 스물두 가지 로마인 이야기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진정성을 드리웁니다.
다음 시즌에서 영특한 아우구스투스의 부상과, 아우구스투스와 각별한 정을 맺고 있는 보리누스와 풀로 두 콤비의 계속되는 활약을 기대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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