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꿈꾸는 정치의 유토피아 - <웨스트 윙〉
TV 드라마 베스트도 꼽아보기 시작한 시기는 만화에 비해 짧지만, 역시 비슷한 양상입니다. 1위는 〈엑스 파일〉이며 2위는 〈웨스트 윙〉인 것이지요. 여기에도 눈 먼 사랑 이론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꼽을 때 부동의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다치 미츠루의 『H2』와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슬램 덩크』입니다. 내 멋대로 베스트를 정하고 논 지 어언 10여 년이 지났지만, 다른 순위가 적지 않은 부침을 겪는 동안 1, 2위는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아마 향후 10여 년 이상이 지나도 1, 2위는 변치 않고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슬램 덩크』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 2위에서 내쳐본 적이 없고(?), 두 작품을 완성도 면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H2』에 대해서는 뭐랄까요, 일종의 눈 먼 사랑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만화책의 재미를 규정하는 모든 지표로 따져 봤을 때 두 작품은 모두 10점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 그 우열을 가리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H2』에는 10점 만점에 플러스 알파를 얹어줄 수 있는 개인적인 연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TV 드라마 베스트도 꼽아보기 시작한 시기는 만화에 비해 짧지만, 역시 비슷한 양상입니다. 1위는 〈엑스 파일〉이며 2위는 〈웨스트 윙〉인 것이지요. 여기에도 눈 먼 사랑 이론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웨스트 윙〉이 드라마적 구성에서 〈엑스 파일〉보다 떨어지느냐, 하면 그렇다고는 말씀드리기 몹시 어려울 뿐더러, 두 작품 모두 한번 평점으로 매겨보자고 든다면 흔치 않게 10점 만점을 받을 수 있는 몇 작품 중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두 작품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드라마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저의 드라마 순위에서 변치 않고 1, 2위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24〉를 다루면서 중독에 관해서는 꽤 입 아프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웨스트 윙〉도 그쪽에 관해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드라마입니다. 엄청난 양의 대사에 복잡하고 역동적인 정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도 머리 아퍼~라는 소리가 나오기는커녕 끝도 없이 하나 보고 다음 편 또 보고 싶고, 시선을 뗄 수 없게 하는 드라마가 〈웨스트 윙〉입니다.
정당성 여부를 떠나 미국의 정세를 안다는 것이 곧 세계의 정서를 안다는 것이고, 세계의 정세를 안다는 것이 미국의 정세를 안다는 것이니만큼, 정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을 갖추고서 현재의 정세를 밀도 있고 실감나게 그리는 〈웨스트 윙〉을 본다면 좀더 재미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필수조건은 안 되는 것이 〈웨스트 윙〉이 지닌 드라마적 힘입니다. 매회 새로 등장하는 정치적 소재를 그려내면서 인간성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이 드라마이니까요. 감히 말씀드리건대, 판타지적 요소를 배제한 현실감 있는 드라마 중에서는 가장 압도적인 작품이 〈웨스트 윙〉이 아닐까 합니다.
1999년 가을에 첫 시리즈를 시작한 〈웨스트 윙〉에 에미상은 4년 연속 TV 드라마 작품상을 안겨주었습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고 무게를 잡는 것 같아 에미상의 시상 결과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늘 공감하기는 힘들어하는 편이지만, 〈웨스트 윙〉의 4년 연속 수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나 불만을 달 수가 없답니다. 일개 팬인 제가 〈웨스트 윙〉을 좋아하는 이유와 TV 프로그램에 대한 가장 큰 시상식인 에미상의 심사위원회가 〈웨스트 윙〉을 작품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사뭇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분명한 건 취향과 관점의 차이를 넘어서 일단 경험한 사람이라면 모두 박수를 보내고 감동을 받으며 서로의 벽을 허무는 그런 궁극의 작품이란 게 있다는 것이지요.
〈웨스트 윙〉은 매우 리얼하게 드라마를 이끌어나가지만, 그것이 곧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또는 비슷하게 옮겨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웨스트 윙〉에서 그리는 백악관과 미국 대통령, 그 아래 보좌진들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있기 힘들지 모를 이상주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틴 쉰이 분한 대통령 바틀렛과 보좌진들은 정치를 유능하고 다부지게 해내기는 하지만 결코 정치적이지는 않습니다. 이 드라마는 오늘날 철권으로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에서 여전히 미국 헌법제정자들(Founding Fathers)의 이념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공략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듯합니다.
1995년 작 〈대통령의 연인〉에서 부드럽지만 힘 있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각본으로 그려낸 아론 소킨은 〈웨스트 윙〉의 크리에이터와 제작자로서 또 한번 멋지고 매력적인 대통령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웨스트 윙〉의 대통령 바틀렛은 겉으로는 부드럽고 친근해 보여서, 그런 모습만 보고 쉽게 여기는 사람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는 힘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캐릭터입니다. 권위를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이지만 명철하고도 부드럽게 자신의 힘을 이용하면서 상황을 장악하는 진정한 카리스마를 드러내고 있는 인물이지요. 부드럽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미지 뒷면에 정치적 술수와 출세 야욕으로 뭉쳐진 의원들이나 정부 각료 등 다른 정치인들을 압도하는 모습이 통쾌함마저 안겨줍니다. 유하다고 무능력하고 멍청한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근사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아래서 대통령과 정책을 짜고 고락을 나누는 개인 보좌진들도 이 드라마의 큰 축입니다. 예전에 『백악관 상황실』이라는 책을 보았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과 보좌진 사무실이 있는 백악관 웨스트 윙의 젊은 고용인들에게서는 여느 정치인들이나 정치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나 감성이 있는 듯합니다. 물론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이다 보니 아름답게 그린 면도 없지 않겠지만, 박봉에 격무에 시달리며 말도 못할 긴장감 속에서 상황을 자신의 정치적 입신양명에만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올바른 정치를 꿈꾸는 청년 이상주의자의 기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밖에서 보면 거의 아담하기까지 한 웨스트 윙 내부에서 곳곳을 바삐 누비며 급박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면 주무대가 실내라는 것도 별로 갑갑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웨스트 윙〉의 대통령 바틀렛이 재임 기간마저 다 마쳐가면서 시리즈는 올해의 7시즌을 마지막으로 종영을 한다고 합니다. 종영을 앞두고 지난 12월에는 첫 시즌부터 대통령 수석 보좌관 리오 맥게리를 연기했던 존 스펜서가 타계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또 물샐 틈 없는 각본의 힘을 보여준 이 드라마도 5시즌을 넘어가며 팬의 입장에서는 조금 이르고 아쉽다 싶게 “레임덕” 현상을 보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테러와 전쟁, 마약, 폭력, 다른 정치기관과의 힘겨루기 등을 박진감 넘치면서도 탄탄하고 지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이 TV 역사상 가장 잘 만들어진 드라마 중 하나로서 길이길이 손에 꼽히며 남겨질 것도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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