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카운티의 아이들 - 〈The O.C〉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어린아이들을 정말로 끔찍하게 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수사물에서도 어린아이와 관련된 사건은 훨씬 예민하게 다루고, 주인공들도 여느 사건에서보다 범인을 훨씬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이 눈에 띄게 티가 날 정도입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어린아이들을 정말로 끔찍하게 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수사물에서도 어린아이와 관련된 사건은 훨씬 예민하게 다루고, 주인공들도 여느 사건에서보다 범인을 훨씬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이 눈에 띄게 티가 날 정도입니다. 보통의 할리우드 상업영화에서 어린아이(더불어 애완동물)는 아무리 위기에 처해 있어도 죽이지 않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체 모를 전염병으로 응급실로 후송된 아이는 어른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죽어 나가는 와중에서도 조용히 심장 박동을 유지하다, 결국에는 극의 후반부에서 사건이 해결되면서 조용히 눈을 뜨고, 격리된 병상의 두꺼운 유리창 너머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던 부모님과 감동적인 해후를 하게 됩니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려는 영화보다 특히 액션영화나 재난영화에서 어린아이의 죽음이라는 설정은 영화를 해피 엔딩으로 끝내느냐 비극으로 끝내느냐 하는 것보다 더욱 민감한 문제인 듯합니다.
허나 몇 년만 지나면 이야기는 싹 달라집니다. 대여섯 살의 귀여운 꼬마 아이가 10년쯤 지나서 청소년이 되면 애물단지도 그런 애물단지가 없습니다. 10년 전에는 미래의 희망으로 대접받던 아이가 술과 약에 쩔어 무책임하게 비행이나 일삼는 사회악으로 그려지기가 일쑤이지요. 1970년대의 <할로윈>을 비롯해서 <13일의 금요일> <스크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슬래셔 공포영화가 십대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도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백조로 자라날 가망성도 전혀 없는 그저 밉기만 한 오리 새끼, 그것이 청소년을 향한 할리우드의 대체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고, 그런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난자당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 그런 “비행” 청소년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청소년들의 비행을 다른 각도, 예컨대 자라가는 데 겪는 성장통 같은 것으로 좀더 섬세하게 접근하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밉살스럽기는커녕 어지간한 어른들보다도 훨씬 속 깊고 하는 짓이 예쁜 아이들이 등장하는 <도슨의 청춘일기Dawson's Creek>가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청소년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저리 날 만큼 똑 부러지는 도슨과 그의 친구들(이미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의 온전한 영상화는 오히려 <도슨의 청춘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은 다 자란 척하지만, 십대적인 사건,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채 나름의 고통을 겪는 모습으로 극의 재미를 이끌었습니다. 더 전에는 비버리힐스라는 부자 동네에 들어간 쌍둥이 남매의 이야기를 그린 <비버리힐스의 아이들>이 인기를 얻으며 10년간 장수했었지요.
〈THE O.C〉도 빈민가 치노에서 어쩌다가 오렌지 카운티라는 부자 동네에 들어간 살게 된 고등학생 라이언 앳우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비버리힐스의 아이들>이 우연히 부자 동네에서 살게 되긴 했지만, 부자들의 “불건전한” 면모에는 물들지 않으며 바른 생활을 유지하는 쌍둥이 남매의 이야기를 표피적으로 그리며 시각적인 볼거리를 보여주는 데 치중했다면, 〈THE O.C〉는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부자들의 세계를 가려운 데 시원하게 긁어주듯 좀더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그쯤 가지고 있으면 남한테 피해 안 준다는 정도의 의식만 품고 나름의 만족을 찾으며 살아갈 수도 있으련만, 그곳 사람들은 그것이 영 어려운지 또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살아갑니다. 아니, 친구나 이웃끼리 얽히고설킨 관계와 거기서 생겨나는 음모와 비밀, 갈등은 그 어느 곳보다 더 첨예하고 복잡합니다.
〈THE O.C〉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요소는 생동감 있게 그려지는 어른들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청소년 드라마들이 어른들을 있으나 마나 한 장치, 때때로 등장해서 현명한 조언을 던져주고 떠나는 도사처럼 그리고 마는 것이 보통이었다면, 〈THE O.C〉의 어른들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중요한 축입니다. 그들은 아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말썽을 피우며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을 이어갑니다. 아닌 게 아니라 〈THE O.C〉의 소재나 줄거리는 요지경입니다. 인물의 복잡다난한 관계는 한 마리의 문어 다리 수만으로는 계산조차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너절하기까지 할 지경인데, 등장인물들이 버겁게 안고 가는 갖가지 복잡한 문제를 아슬아슬하게 감당해 내며 풀어나가는 것이 이 드라마의 묘미입니다.
악다구니의 치노를 벗어나 오렌지 카운티에 진입한 라이언, 쌍꺼풀 없는 러셀 크로우처럼 생긴 벤자민 매킨지가 분한 라이언은 부자 세계에서 오히려 더 심한 인간의 치부를 발견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의 가난한 생활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인간적 갈등을 내비칩니다. 역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나중에 국선 변호사가 된 샌디 코헨은 부동산 개발업자인 부자 아내 덕에 오렌지 카운티에 살며, 라이언을 오렌지 카운티로 데려오는 역할을 하지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이래로 막강 느끼남의 면모를 보여 온 피터 갤러거가 샌디 코헨으로 분해, 십대들이 진정 꿈꾸는 아버지상으로 등장하며 드라마에 묵직한 힘을 보태줍니다.
풋풋한 십대들에 비해서도 전혀 스타일이 밀리지 않는 샌디의 아내 키어스틴, 그들의 아들이자 라이언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세스의 막강한 빈정대기 유머는 <보스턴 리갈>의 앨런 쇼어의 청소년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THE O.C〉에는 볼거리도 풍부합니다. 부자 동네가 배경인 만큼 예쁜 집, 그 안에 더 예쁜 가구와 소품들, 스타일 나는 패션 등, 고단한 사건, 사고의 처리 과정을 지켜보느라 지친 눈을 달래주는 요소가 많답니다. 소재와 구성이 굉장히 너저분한 듯 보이면서도, 청소년 드라마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요소, 그러니까 절친한 친구들끼리 연애 관계로 얽히며 존재에 대한 치명적인 고민을 겪게 되는 장면이 없다는 점에서는 시청자의 피곤함을 좀 덜어주면서 깔끔한 안도감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마리사 쿠퍼 역을 맡은 미샤 바튼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느끼는 팬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바튼은 〈THE O.C〉를 통해 틴에이저 스타로 거듭났지만, 어려서부터 정식으로 차근차근 배우 수업을 받아오고, <노팅힐>이나 <식스 센스> 또는 여러 독립영화에서 잠깐씩 등장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발산하며 만만찮은 존재감을 뿜어냈던 배우였습니다. 그런 배우가 성인배우로 가는 도정에 TV 드라마의 틴에이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제까지의 행보에 비추어보면 약간 엉뚱한 비약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라이언이나 세스, 서머 등 다른 십대 등장인물들에 비해 캐릭터가 크게 정감이 가지 않게 그려지고, 주요 인물인데도 좀 겉돌며 답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기는 얻었으나, 배우로서의 매력과 가능성에서는 오히려 큰 소득을 올리지 못한 경우가 〈THE O.C〉의 미샤 바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거나 〈THE O.C〉는 중산층 내지 부유층의 요지경 인생사를 드러내는 데는 “Everyone Has a Little Dirty Laundry"를 태그 라인으로 하는 <위기의 주부들>보다 수위나 속도감 그리고 긴장감 면에서 한층 더 높은 듯합니다. 십대들 이야기만 다루면 몇 편 보다가 감정이입의 한계에 도달할 법도 한데, 어른들 이야기도 균형감 있게 다루어 공연히 고개를 더 끄덕이게 되는 면도 있습니다. 보다 보면 빈틈이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느껴지는 <도슨의 청춘일기>에 비해, 마구 망가지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에 괜히 사실적인 감동도 느껴져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드라마가 〈THE O.C〉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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