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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수 없는 경지의 유머감각 - 〈보스턴 리갈〉

조금 개인적인 얘기를 하나 풀어놓자면, 2004년에 첫 시즌이 시작된 〈보스턴 리갈〉을 보기 시작한 곳은 당시 제가 머물던 보스턴이었습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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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데이빗 E. 켈리가 또 하나의 법정 드라마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전공분야이니 잘 해내리라는 믿음도 있는 한편에 자기복제의 위험에 대한 우려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프랙티스〉와 〈앨리 맥빌〉에서 드러난 법정 드라마와 코미디 연출에 대한 켈리의 창작능력은 당대, 아니 미국 드라마 역사상 최상급에 속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 밥에 그 나물로 동어반복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쨌거나 우려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게죠. 하지만 웬걸요. 코미디 작가로서 켈리가 지닌 역량의 그야말로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보스턴 리갈〉입니다. 제임스 스페이더라는 걸출한 배우를 내세워 제작되는 〈보스턴 리갈〉의 파일럿은 파워풀한 에너지를 드러내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회를 거듭할수록 거침없고 탄탄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며 〈로스트〉 〈위기의 주부들〉 〈그레이스 아나토미〉와 더불어 2004년 ABC의 확실한 루키 라인업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조금 개인적인 얘기를 하나 풀어놓자면, 2004년에 첫 시즌이 시작된 〈보스턴 리갈〉을 보기 시작한 곳은 당시 제가 머물던 보스턴이었습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지요. 보스턴에서 2년 가까이 머물면서 〈보스턴 리갈〉을 보지 않고 건너뛴다는 것은, 어쩐지 세계 4대 미술관중의 하나라는 보스턴 파인아트 박물관은 구경 갔으면서도, 보스턴 레드 삭스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즈 선발 경기를 구경하지 못한 느낌, 혹은 입장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보스턴 필하모닉 정기 연주회는 챙겨 봤으면서도, 12년 만에 재결합한 보스턴 출신의 락 밴드 픽시스의 고향 방문 공연을 놓친 느낌, 아니면 근사한 “보스턴 백”은 하나 장만했으면서도 전통의 “보스턴 연필깎이”는 챙기지 못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말하자면 다른 곳도 아니라 보스턴이니까 한 템포 더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을 그저 지나치고 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러니까, 그랬답니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머물면서 괜히 스티븐 킹의 『쿠조』를 다시 읽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미스틱 리버〉를 부러 다시 보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은 책꽂이 손이 바로 닿는 곳에 꽂아두었지만, 동어반복 때문에 머뭇거리면서 손을 대고 있지 않다가 살던 곳이 배경이다 보니 그래도, 하는 마음에 한번 봐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해서 보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보스턴 리갈〉을 보기 시작했을 때 제가 가지고 있던 사전 정보는 보스턴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과, 역시 변호사들의 이야기였던 〈프랙티스〉의 스핀 오프 시리즈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스핀 오프(spin off)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스핀 오프라 함은 경제 영역에서 “회사나 연구소 근무자가 특정 분야의 기술을 가지고 이를 활용해 창업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 TV 쇼 비즈니스 영역에서는 “큰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의 뒤를 이어 그와 비슷한 소재와 내용으로 만들어지는 드라마”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CBS에서 〈CSI〉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 아우라와 테크닉을 그대로 빌어서 공간적 배경만 달리한 〈CSI: 마이애미〉와 〈CSI: 뉴욕〉을 만들어낸 게 최근 가장 성공한 스핀 오프의 사례입니다.

기존의 히트 드라마에 출연했던 등장인물을 주인공으로 뽑아내서 만들어지는 캐릭터 이동형의 스핀 오프도 눈에 띕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스핀 오프라고 평가받는 NBC의 시추에이션 코미디 〈프레이저〉는 〈치어스〉의 캐릭터 중 한 명인 프레이저 박사가 고향인 시애틀로 돌아오는 방식을 택했고, 최근의 〈조이〉 역시 〈프렌즈〉의 여섯 캐릭터 중의 하나였던 조이 트리비아니가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위해 누나가 살고 있는 LA로 이사 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보스턴 리갈〉과 〈프랙티스〉의 관계 역시 〈조이〉와 〈프렌즈〉의 관계, 〈프레이저〉와 〈치어스〉의 관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프렌즈〉와 〈치어스〉의 조이 트리비아니와 닥터 프레이저가 〈조이〉와 〈프레이저〉라는 새로운 쇼의 주연을 맡았듯, 〈프랙티스〉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여덟 번째 시즌에 변호사 앨런 쇼어 역으로 출연했던 제임스 스페이더도 〈보스턴 리갈〉에서 기존의 캐릭터를 그대로 이동해서 드라마를 이끌어 갑니다.

이 쇼는 제목 그대로 보스턴을 배경으로 해서, 한 굴지의 로펌을 무대로 벌어집니다. 〈프랙티스〉의 스핀 오프라고는 하지만, 캐릭터나 스타일 면에서는 〈앨리 맥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처음에 에너지가 좀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은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두어 번씩 반복해서 본 〈앨리 맥빌〉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회가 지나갈수록 사람 잡게 웃겨지는 드라마가 〈보스턴 리갈〉입니다. 켈리가 〈앨리 맥빌〉에서 펼쳐 보인 엉뚱망뚱한 캐릭터들과, 기괴하고도 궤변론적인 유머감각은 더욱 더 갈고 닦여 이 작품에도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앨리 맥빌〉에서는 가끔씩 앨리의 상상을 통해 판타지를 특수효과로 보여주곤 해서 웃음을 자아냈던 반면, 〈보스턴 리갈〉은 코미디를 조력하는 이러저러한 부가장치 하나 없이 오로지 구성과 연출 하나만으로 몇 갑절의 강도 높은 웃음을 이끌어냅니다. 〈보스턴 리갈〉이 〈앨리 맥빌〉보다 오히려 더 고단수라는 주장은 그러한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켈리는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사를 법과 재판이라는, 어찌 보면 세상사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단순하게 판가름 내려야 할 제도 속에 풀어내는 데는 대가급의 크리에이터인 것 같습니다. 물론 세상과 법과의 대비점이 워낙 크다 보니 법과 관련된 것에 이야기 소재가 풍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고, 그렇다 보니 미국에서 법에 대한 드라마는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그건 그렇고, 〈앨리 맥빌〉에서도 그랬지만 〈보스턴 리갈〉에서도 이성과 냉철함이 앞서야 할 변호사들이 거의 다중인격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면서 끊임없이 궤변을 쏟아내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데, 그 과정에서 가히 저항할 수 없는 경지의 유머감각이 등장합니다. 제임스 스페이더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은 속된 말로 완전히 꼴통들인데, 그것도 아주 지적인 꼴통들입니다. 지적으로는 어디에다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엘리트이지만, 감정이나 정신적으로는 어딘가 문제가 조금씩 있는 사람들입니다. 흑 아니면 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미묘하고 세련되고 유머 넘치게 조소하는지, 보고 있자면 그 기지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대단하답니다.

이 작품의 크리에이터이자 메인 작가인 데이빗 E 켈리의 거의 그로테스크적인 유머감각을 지켜보자면, 그가 분위기나 느낌은 조금 다르지만 우디 앨런 이래 가장 뛰어난 코미디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본성은 결코 두 쪽으로만 나뉘게 생겨먹을 수가 없다는 주장을 미친 사람들처럼 주절대는 캐릭터들의 입으로 쏟아내는데, 그 또한 저항하기가 힘들더란 말입니다. 클린턴과 여자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맛 뵈기도 안 됩니다. 페미니즘, 스포츠 등 이 드라마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켈리는 연예산업에 진출하기 전에 로펌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가 만든 드라마들을 보면, 그가 그 시절 도대체 어떤 인간들을 만났기에,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프랙티스〉로 2004년 에미상 드라마 부분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2005년도에 〈보스턴 리갈〉로 남우주연상 2연패를 달성한 제임스 스페이더의 연기는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탁월합니다. 〈24〉로 요즘의 미국 드라마에서 흔치 않은 원 톱 배우를 꿰차고도, 4년 연속으로 후보에만 오르고 수상에는 실패한 키퍼 서덜랜드의 불운이 당연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보스턴 리갈〉의 “코믹” 연기진은 제임스 스페이더뿐이 아닙니다. 동료 변호사들을 연기하는 윌리엄 섀트너나 캔디스 버겐의 연기 또한 압권입니다. 특히 데니 크레인이라는 걸출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윌리엄 섀트너는 말 그대로 이름 하나로 시청자를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이 캐릭터는 “데니 크레인” “데니 크레인” 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주문처럼 내뱉고 다니는데, 그 한마디가 마치 메가톤급 유행어처럼 불가항력적으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2005년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즈음의 최신 유행어를 잘 알지 못해서 적절한 인용을 시도하지 못하겠는데요. 그래도 굳이 썰렁함을 각오하고서라도 인용을 해야 한다면, 심형래의 “영구 없다” 정도가 비슷한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하튼 “데니 크레인”이라는 이름 다섯 자만으로 그토록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할 정도로 윌리엄 섀트너가 연기하는 캐릭터 데니 크레인은 극을 압도합니다.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이었다는 것이 2004년 보스턴 레드 삭스가 86년 만에 거둔 메이저 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입니다.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에서도 인상적으로 잘 표현했지만, 〈보스턴 리갈〉에서 접근한 “레드 삭스 신드롬”은 너무 절묘해서 공감, 감탄 일색으로 흥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점을 말하자면, 너무너무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새로운 두려움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 될 듯하다는 내용의 에피소드였는데, 이런 이런, 이건 “데니 크레인 vs 영구 없다”보다도 더 알듯 말듯 애매모호한 예시가 되어버렸군요.

자, 정리하겠습니다. 코미디 장르로 분류되는 〈위기의 주부들〉에는 코미디가 풍성하게 등장하지 않지만, 코미디로 분류되지 않는 〈보스턴 리갈〉에는 넘치고 넘치는 것이 코미디입니다. 소리 내어 웃을 만한 코미디, 팬을 자처하며 매료될 수 있는 코미디, 지적이면서도 어깨에 힘을 빼고 웃을 수 있는 농담이 〈보스턴 리갈〉입니다. “법정에서는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 보일 수 있는 자신만의 마술이 필요하다”는 데니 크레인의 주장 마냥, 밋밋한 삶의 흐름 속에서 깜짝 마술쇼를 보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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