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라져버린 곳 - 〈로스트〉
2004년은 미국 3대 지상파 방송국 중 하나인 ABC에게는 가히 기념비적인 한 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00년 이후 〈CSI〉를 필두로 해서 다양한 스핀 오프 시리즈로 파상공세를 펼치는 CBS에 밀려 변변한 히트 드라마 하나 내지 못하던 ABC였답니다.
2004년은 미국 3대 지상파 방송국 중 하나인 ABC에게는 가히 기념비적인 한 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00년 이후 〈CSI〉를 필두로 해서 다양한 스핀 오프 시리즈로 파상공세를 펼치는 CBS에 밀려 변변한 히트 드라마 하나 내지 못하던 ABC였답니다. 그러나 2004년 ABC는 그야말로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로스트〉로 시작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위기의 주부들〉 그리고 〈그레이스 아나토미〉 〈보스턴 리갈〉 등의 히트 드라마가 2004년 한 해에만 첫 시즌을 시작하며 ABC에서 쏟아진 작품들입니다.
CBS가 〈CSI〉의 성공으로 스케일이 굵직하고 실패 가능성이 적은 범죄 수사물이라는 테마 속에서 작은 변주를 거듭하며 안정성 위주로 갔던 반면, ABC는 활로를 모색하면서 다양한 소재를 시도했습니다. 작년에 새로 시작한 네 개의 드라마만 해도, “재난 스릴러” “가정주부를 위한 트렌디 블랙 코미디” “젊은 감각의 메디칼 드라마” “지적인 법정 슬랩스틱” 등으로 다양한 삶의 리얼리티를 상상한다는 드라마 본래의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2005년 에미상 드라마 작품상에 빛나는 〈로스트〉가 버티고 있습니다.
드라마 첫 시즌을 시작할 때, 그 드라마가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스타일로 앞으로 나아갈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에피소드를 파일럿(pilot)이라고 부릅니다. 미국 드라마가 양적으로 엄청난 팽창을 거듭함에 따라, 파일럿 제작에서의 경쟁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파일럿에 대한 반응 여부로 드라마의 향후 사활이 걸려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드라마가 에피소드와 시즌을 거듭하며 살아남을지, 아니면 몇 편 가다가 작파가 되고 말지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파일럿입니다. 〈로스트〉의 파일럿은 첫 1, 2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로스트〉파일럿이 최초로 방영되었을 때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이제까지 2시즌 중반 정도까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평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엑스 파일〉 이후 최고의 컬트 드라마가 탄생했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로스트〉 파일럿에 대한 연출자 J. J. 에이브람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느냐를 보여주는 깜찍한 예로, 〈로스트〉에서 비행기 기장(pilot) 역할로 카메오 출연을 한 배우는 ABC의 인기 드라마이자 에이브람스의 또 다른 히트 방영작인 〈앨리어스〉에서 에릭 와이스 역으로 출연하고 있는 그렉 그룬버그입니다. 그룬버그는 연출자 선생님의 부름에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달하듯, 정체불명의 생명체에게 사지가 찢겨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역할을 말 그대로 몸을 날려서 열연합니다. 물론 그의 죽음으로 생겨난 정체불명의 생명체 미스터리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살피는 것도 〈로스트〉의 아주 중요한 시청 포인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스트〉는 원래 13부작 미니시리즈로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답보 상태에 빠져 있던 ABC가 몇 년 동안 이어지는 장편 연속 드라마로 무리수를 두느니, 1977년 당시 생소했던 개념인 미니 시리즈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일약 부상시킨 10부작 〈뿌리〉의 성공을 염두에 두고 내린 포석일 수도 있습니다. 30여 년 전 ABC는 미니 시리즈 〈뿌리〉의 드라마틱한 성공으로 창사 이래 처음으로 공중파 방송사 시청률 1위를 기록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 “〈뿌리〉의 아련한 추억이 한 번만 더 펼쳐질 수 있다면”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로스트〉는 첫 회가 방영된 이래로 선전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드라마 시청률 부문에서 상위권에 랭크되었고, 대박 드라마의 조짐이 여기저기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ABC 또한 13부작 미니 시리즈를 풀 시즌(full season)으로, 다음 시즌을 보장하는 리턴드 시즌(returned season)으로 연장방영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미국 드라마에서 연장방영 또는 조기종영은 비일비재 이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거의 유일한 잣대는 시청률입니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드라마는 그냥 서너 개 에피소드만 방영한 상태에서 출연료를 돌려주고서라도 과감하게 판을 접습니다.(얼마전 종영한 〈가을 소나기〉처럼 최저 시청률 드라마가 가십거리가 되며 언론에 오르내리는 호사 같은 것은 애초에 없습니다.) 반면에 시청자들의 호응이 좋으면 역시 말 그대로 갈 데까지 갈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늘리기를 시도합니다. 단언하건대 TV에서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제작 태도는 사치스러운 이율배반 또는 오로지 자기만족의 소산입니다. 연장방영은 자본주의의 가장 솔직한 치부 중 하나이자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관건은 이 치부마저도 어떻게 하면 극한까지 몰아붙여 상업적으로 성공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청률이 낮음에도 대단히 훌륭한 질을 선보이는 단편 드라마나 미니 시리즈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길게는 10년 이상도 갈 수 있는 장편 드라마는 시청률이 나오지 않고는 유지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시청률이 낮으면 조기종영하고, 시청률이 높으면 연장방영한다는 시청률 지상주의가 아니라, 연장방영을 한다면 기존의 질을 얼마나 일관되게, 또는 향상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인기만 등에 업고 매너리즘적인 제작 행태를 일삼으면서 질질 끄는 형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해왔던 대로 계속 재미있게 보여주겠다는데 마다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시청률만 등에 업고 연장방영이 결정된 드라마가 〈로스트〉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로스트〉는 무인도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살아남은 48명의 사람들이 그려나가는 생존기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48명이 무인도에 불시착하여 다시 그들만의 소우주를 꾸려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보다는 《파리대왕》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기도 하고, 실제로 드라마에도 많은 반목과 갈등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로스트〉의 창작자 중 한 명인 에이브람스는 물론 문학작품들의 서사만 차용하지는 않습니다. 에이브람스는 〈앨리어스〉에서 이미 다른 것은 몰라도 “순전한 재미”만큼은 확실히 보여줄 재능이 있음을 증명해 냈습니다. 설정은 단순합니다.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서 살게 된 사람들, 기이하게도 바깥세상에서는 그들의 존재를 찾아낼 수 없고, 몇 시간이 지나면, 아니 많이 기다려서 하루 이틀 기다리면 구조되리라고 철석같이 믿던 사람들은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보름이 되고 한 달이 되는 동안, 섬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합니다.
이 단순한 설정에서, 에이브람스는 서투른 연출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기량만, 쇼 비즈니스에서 되는 요소만 모아 드라마를 꾸며냈습니다. 〈서바이버〉의 생존경쟁, 〈앨리어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미스터리, 〈24〉의 단순무식하다 싶은 긴장감, 〈주라기 공원〉 식의 폭발적인 스케일 등을 작은 TV 화면 속에 박진감 있게 녹여낸 것입니다. 〈로스트〉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많습니다. 미스터리는 아직 수습되기보다는 팽창해 가고 있는 단계입니다. 단순한 설정에서 가지를 쳐가며, 그 단순함을 정말로 얼마나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여주며 재미를 이끌어낼 것인지가 관건일 텐데, 황당무계하고도 일견 엉성해 보이기도 하는 〈앨리어스〉를,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게 빠져들게 해주었던 에이브람스는 〈로스트〉의 창작과 연출을 맡기에는 아주 적격인 사람입니다.
에이브람스가 기획하고 직접 연출을 담당했던 〈로스트〉 파일럿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TV 드라마 역사상 가장 비싼 제작비용은 젖혀두더라도, 첫 장면, 대나무 숲에서 눈을 떠서 주머니 속의 보드카 샘플병을 슬쩍 확인하고 하늘에 향해 뻗어 있는 대나무를 헤치고 달려가는 잭(1994년 드라마 〈파티 오브 파이브〉에서 장남 역할을 맡으며 책임감 강하고 선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던 잭 역할의 매튜 팍스는 〈로스트〉에서도 비슷한 페르소나를 재현합니다)의 움직임은 마치 무협활극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으며, 불타는 항공기 잔해 틈에서 절규하는 승객들을 추스르며 인간적인 고리를 만들어 나가는 상황에는 재난극의 재미는 “바로 이거야”를 외칠 수 있는 긴박감이 충분했습니다. 거기에 마치 공룡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야자수를 흔들며 들려오는 기이한 생명체의 포효 소리라는 상황의 반전을 드러내고, 여기에 따뜻한 남쪽 섬에 난데없이 등장한 북극곰의 황당함까지 가세합니다.
무인도 표류기로만 나간다면 좀 칙칙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말끔하게 날려 버리는 과거와 현재, 현대 문명사회와 미개사회의 오버랩과 플래시백 등 너무도 멋진 연출도 시도되었습니다. 유례없이 1,2편으로 나뉘어서 제작되었던 〈로스트〉의 파일럿에는 극찬이 쏟아졌답니다. “이건 TV 드라마가 아니라 한 편의 영화다” 하는 단순한 진언에서부터, “이제 나는 〈로스트〉 폐인이야!” 하는 단호한 각오, “이야, 역시 떼거리 드라마는 그 수만으로도 압도적이야!”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열광, 나아가서 “최, 최고다. 아직 안 본 사람에게 해줄 말은 이 한마디뿐, 부럽다, 인생의 낙이 나보다 많이 남았잖아!” 하는 인터넷 만화 성게군의 깜찍한 환호까지.
미니 시리즈에서 풀 시즌으로, 풀 시즌에서 장기 계약으로, 인기 드라마의 당연한 수순을 밟으면서 2005년 현재 미국에서 두 번째 시즌이 방영되고 있는 〈로스트〉. ABC는 〈로스트〉의 화려한 데뷔를 중심으로 한 몇몇 드라마의 폭발로 2004년 한 해를 전년대비 시청률이 약 15퍼센트 이상 상승되는 가시적인 효과와 더불어 8년 만에 적자에서 헤어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빼먹을 수 없는 사실이 있는데요, 〈로스트〉에는 48명의 생존자 중 드라마를 이끌어 나가는 10여 명의 메인 캐릭터에 한국인 배우 김윤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김윤진은 경상도 사투리 한국말을 구사하는(“단추 채아라!”) 섹시 가이(?) 대니얼 대 김과 부부로 등장합니다. 시즌 초반 에피소드에서는 서구사회가 바라보는 다소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적인 캐릭터로 등장해서 한국 여자와 한국 남자에 대한 심한 편견을 자아낸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극 후반으로 가면서는 김윤진이 맡은 선이 영어를 말할 줄 아는 것이 밝혀지고, 드라마의 주요한 한 축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훗날의 변신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그리기 위해서 초반의 캐릭터 설정을 너무 경직되게 설정했다는 감을 지우기가 어렵지만,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섞이며,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들여다보고 확인해 가고 있는 두 캐릭터입니다. 두 사람은 두 번째 시즌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그 비중이 아주 커지면서 거의 러닝 타임의 반 이상에 등장할 만큼 어엿한 주연급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두고 어느 시청자는 “내 10여 년 이상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반 이상 리스닝이 완벽하게 된 드라마는 처음이었다!”라는 감동어린 시청소감을 내놓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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