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 나는 어쩌다 바보상자와 이토록 미련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사람은 영화만이 주는 독특한 언어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서사가 살아 있는 탄탄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열광합니다.
1990년 영화감독 데이빗 린치가 TV 시리즈 〈트윈 픽스〉를 만들었을 때, TV에도 이런 아트가 실현될 수 있나 하며 열광하는 매니아층이 생겨났습니다. 한국 드라마에 많이 쓰는 “폐인 드라마”의 미국판 시조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1993년 〈엑스 파일〉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는, "X-파일(X-Philes)"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팬 집단이 생겨났습니다. 종영된 지 3년이 넘었지만, 다시 보아도 불후의 명작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드라마입니다. 〈엑스 파일〉의 남자 주인공 역의 데이빗 듀코브니는 당시에는 현재의 욘사마 못지않은 멀사마로 군림하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엄청난 인기를 받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멀더가 게스트 출연했다는 이유로,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최고의 에피소드는 시즌 6의 열 번째 에피소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이겠습니까? 하지만 TV 드라마에도 아트가 실현된다거나, TV 드라마와 영화를 놓고 예술적 성취도를 가늠하며 비교하는 것은 의미도, 주제도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리자면, 한때 영화라면 집념을 가지고 섭렵했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빼고는 영화 보면서 잔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그런 열광에는 영화소녀적인 치기가 어느 정도 작용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후 몇 살 나이를 더 먹고 나서, 치기를 한꺼풀 벗고 나니 눈에 들어온 것이 TV 드라마였습니다. 몇 년 전 〈웨스트 윙〉을 접했을 때, 거의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빠져서 보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엑스 파일〉과 〈프렌즈〉 정도나 에피소드 순서대로 놓치지 않고 보고, 〈앨리 맥빌〉 〈도슨의 청춘일기〉를 케이블 TV에서 보여주는 대로 보는 정도였다면, 〈웨스트 윙〉을 본 이래로는 〈24〉 폭풍이 지나가고, 〈CSI〉, 〈앨리어스〉, 〈스몰빌〉 등등의 드라마를 처음부터 쭉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중독되었다는 말이 딱 맞는 듯합니다.
영화를 볼 때 작가주의다, 장르다 해서 도전적으로 섭렵하듯, 〈웨스트 윙〉이후의 드라마 시청 라이프는 시즌별, 장르별, 방송국별 등으로, 온갖 미국 드라마를 차례차례 포식해 가는 양태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카데미상 시상식 보다는 에미상 시상식 결과를 예측하며 살고, 영화 박스 오피스 순위는 몰라도 주간 전미 드라마 시청률 20위까지의 목록은 꼬박꼬박 챙겨 봅니다. 미국의 프라임 타임 드라마들이 새 시즌을 시작하는 매년 9월이 되면 가슴이 콩탕콩탕 뛰기 시작하고, 많은 드라마들이 시즌 피날레를 장식하는 매년 5월이 되면 마냥 아쉽기만 하기도 합니다.
왜 한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고 중독이 되는 걸까요? 시간적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러티브를 차근차근 짜나갈 수 있다는 점이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연속극의 재미인 것이지요. 경악할 만큼 놀라운 영화 〈반지의 제왕〉도 일반적인 러닝 타임인 2시간 정도의 길이로 만들었으면 그런 완성도가 나왔을까요? 세 권짜리 묵직한 소설이 영상 위에 그토록 완벽하게 녹여진 데는 분명히 그 이유도 있습니다. 가령 걸작이라고 분류되는 〈대부〉 시리즈는 원작 소설을 읽고 다시 보면, 영화가 무언가 할 말을 덜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넉넉하다고 누구나 피터 잭슨같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질이 보장될 리는 없겠지만, 실패의 확률이 조금 낮아질 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식으로 TV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내러티브를 짜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영화보다 풍부합니다. 거기에 요즘처럼 대작 드라마가 풍부하게 제작되는 상황에서는 영화에서나 보던 방대한 스케일과 특수효과 등의 장치까지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난 3년 동안 〈반지의 제왕〉을 기다리며 연말을 고대했던 그 설렘이 TV 드라마 팬들에게는 수십 년 이상 변함없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있는 셈이지요.
책도, 영화도, 음악감상, 그림 감상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바보상자 TV 드라마일까요? TV는 책을 읽는 것처럼 사유활동을 심하게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지극히 정서적이면서도 감정적인 가교 역할을 수행하지도 못합니다. 영화처럼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장치와 사유를 풀어내는 기교와 상상력도 부족하며, 꼭 그런 기교와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매체입니다. 그래서 TV를 자주는 안 보나, 본다면 PBS 같은 교양 방송이나 디스커버리 채널, 역사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수와 실제 시청률 사이의 괴리를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케이블 채널인 HBO에서는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이라는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들을 투 톱으로 내세운 미니 시리즈를 제작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자이자 역사학자인 스티븐 앰브로스의 베스트셀러 《불굴의 용기》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을 캐스팅하면서까지 10부작 드라마로 제작되는 이유가 걸작입니다. 이유는 “영화로 만들기에는 너무 방대한 분량의 내용이라 상영시간의 압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예전 같으면 TV 드라마는 거들떠도 안 볼 톱스타 영화배우들이 TV 드라마의 달라진 대중적 영향력, 특히 세계적 영향력과 달라진 질을 고려하면서, 욕심이 나면 출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한국에서도 퍼져가는 듯합니다. 〈맥가이버〉나 〈비버리힐스 90210〉 이후 끊어졌던 외화 드라마 열풍이, 한국배우 출연으로 화제가 된 〈로스트〉나 공중파에 방영되어 인기를 얻은 〈위기의 주부들〉로 다시 불붙고 있는 조짐이 보입니다. 〈프렌즈〉나 〈엑스 파일〉을 통해 미국 드라마나 시트콤의 맛을 보기 시작했던 사람들은 〈CSI〉나 〈웨스트 윙〉 〈24〉 〈닙턱〉 〈보스턴 리갈〉 등 다른 쇼도 찾아보기 시작했으며, 그 열기는 인터넷 곳곳에 개설된 드라마 동호회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탄탄한 구성과 극적 재미를 만끽하며, 드라마를 보는 눈높이가 한층 높아졌다는 사실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사람은 영화만이 주는 독특한 언어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서사가 살아 있는 탄탄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열광합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급속히 정착된 HDTV 시스템으로, 미국의 거의 모든 드라마는 HD로 송출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경쟁이 가열차지면서, 질과 재미 그리고 감동으로 승부하겠다는 제작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양질의 드라마가 양산되면서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보통 40여 분씩, 1년에 스무 개 남짓 제작되는 TV 드라마는 웃고, 울고, 감동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의 재미를 담뿍 담고 있습니다. 짧고 굵게 사유의 집적을 이루어내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겠지만, 다량으로 생산되는 TV 드라마에서 알토란므 빼먹듯 골라먹는 재미를 느끼며 웃음과, 눈물, 감동, 교훈이 살아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 조그맣고 네모난 TV 박스 안에 온 정신을 빼앗긴 채, 두 주먹 불끈 쥐고 바르르 전율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어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제가 그렇게 바보상자와 미련한 동거를 시작했던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