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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얼마 전에 메리 로취의 『스푸크』를 읽었습니다. 첫 작품인 『스티프』가 과학 세계에서 인간 시체가 어떻게 쓰이는가에 대한 보고서라면, 두 번째 작품인 『스푸크』는 인간 영혼을 탐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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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로취의 『스푸크』의 마지막 문장과 결론이 폭로됩니다. 예민하신 독자들은 알아서 피하시길.)

얼마 전에 메리 로취의 『스푸크』를 읽었습니다. 첫 작품인 『스티프』가 과학 세계에서 인간 시체가 어떻게 쓰이는가에 대한 보고서라면, 두 번째 작품인 『스푸크』는 인간 영혼을 탐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스티프』를 선호하는 모양이지만 전 『스푸크』 쪽이 더 좋았습니다. 일단 메리 로취의 그 독특한 유머 감각이 『스푸크』 쪽에 더 확실하게 살아 있어요. 『스티프』의 시체들은 책이 진행되는 동안 놀림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로취는 그로테스크한 유머로 끔찍한 대상을 발랄하게 꾸미고 있지만, 나름대로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과학세계에 남긴 업적을 예찬하고 있지요. 하지만 『스푸크』 쪽에선 농담이 더 강해집니다. 한마디로 주인공들이 더 바보 같지요. 그들이 영혼과 불멸과 천국을 찾아 헤매는 과정은 존중할 만 하지만 그들이 그러는 동안 한 일들은 지금은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영혼과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고 그를 증명하기위해 노력하지만 19세기 선배들처럼 낙천적으로 믿지는 않지요. 지금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진지한 과학적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뻔뻔스러운 농담과 이죽거림으로 가득 차 있는데, 로취 자신이 그렇게 사람 좋은 저널리스트가 아니었다면 조금 잔인하게도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로취 자신이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푸크』는 단순한 영혼의 탐구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머물지는 않습니다. 의미가 조금 더 넓지요. 『스푸크』에서 정말 중요한 건 영혼이 아니라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입니다. 여기서 영혼은 다른 단어로 얼마든지 교체될 수 있어요. 그건 신일 수도 있고 빅뱅 우주론일 수도 있고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주의일 수도 있으며 애인의 마음이나 좋아하는 연예인 오빠의 결백함과 같은 사사로운 것일 수도 있지요. 어떤 증거도 없이 우리가 일단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고와 논리의 기반으로 삼는 어떤 것 말입니다. 소위 ‘회의론자’들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전 그들이 ‘회의’와 ‘이성’이라는 말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들을 지탱하는 것도 역시 세계에 대한 비이성적인 믿음이니까요. 물론 가짜 엑토플라즘을 토해내는 영매를 믿느니 회의론자를 따라가는 게 대부분의 경우 남는 장사이긴 합니다만, 참이냐 거짓이냐를 떠나 이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성적인 행동인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로취는 꽤 재미있는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로취는 책을 맺으며 자신이 영혼의 존재를 믿어야 할지 결정합니다. 지금까지 이 사람이 추적해온 내용을 보면 안 믿는 게 낫겠죠. 영혼 탐구는 온갖 종류의 사기와 착각과 오해가 범벅이 된 영역이니까요. 로취 자신도 이 책에서 노골적인 사기 행각 몇 개를 직접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로취는 뭔가 있을 법한 몇몇 흐릿한 현상도 부정하지 못해요. 회의론자들이라면 오컴의 면도날을 휘두르며 그 흐릿함을 잘라버렸겠지만 그들과 분명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요. 고로 이 사람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아마도 나도 내세를 믿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 아마도 폭로전문가들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들과는 공동묘지에 함께 가도 재미가 없다. 무슨 상관이람. 나는 유령을 믿는다.”

비논리적인 행동일까요? 아뇨, 전 로취의 태도야말로 진정으로 논리적이라 생각합니다.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건전하기도 하죠. 로취의 결론에서 중요한 건 로취가 무엇을 선택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로취가 자신의 믿음에 어떤 무게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거죠. 로취는 아마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면 조금 실망은 하더라도 말없이 받아들일 겁니다. 이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은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는 몰라도 해치지는 않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망치는 건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그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런 확신을 안심하고 가질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고 사려 깊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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