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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의 항구성

바로 얼굴의 일관성이지요. 이 책에 등장하는 위페르는 주근깨가 얼굴에 가득한 무표정한 십대 소녀일 때나, 얼굴에 메이크업을 짙게 한 냉담한 중년 여인일 때나, 언제나 변함없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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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연기파 배우 이자벨 위페르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Isabelle Huppert : Woman of Many Faces』라는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세계를 돌며 하고 있는 동명의 전시회 사진들을 모은 사진집이지요. 페이지를 넘기면 로베르 드와노, 리처드 애브던, 허브 리츠, 피터 린드버그와 같은 저명한 사진작가들이 찍은 이자벨 위페르의 얼굴 변천사가 펼쳐집니다. 가장 이른 시절의 사진이 1968년에 찍은 것이니, 거의 40년에 걸친 얼굴의 역사인 거예요.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사실 책의 제목과 살짝 위반됩니다. 바로 얼굴의 일관성이지요. 이 책에 등장하는 위페르는 주근깨가 얼굴에 가득한 무표정한 십대 소녀일 때나, 얼굴에 메이크업을 짙게 한 냉담한 중년 여인일 때나, 언제나 변함없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헤어스타일이 바뀌고 스타일이 달라지고 주름이 생겨도 이자벨 위페르라는 코어 자체는 변함없이 남아 있는 것이죠. 사실 스타란 그래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항구적인 아이콘으로 남을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고 있어야죠. 이런 건 보톡스를 맞아 억지로 되찾은 피부의 팽팽함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 우리나라 배우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지금 활동하는 우리나라 여자 배우들 중 이런 항구성을 갖춘 사람이 얼마나 될까? 흠... 김지미는 어떤가요? 꽤 나이가 들어 은퇴하기 전까지 김지미는 스타로서 일관된 이미지와 힘을 유지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성우 목소리가 배우 자신의 목소리로 바뀌어서 팬들이 심한 당혹감을 느끼긴 했지만요. 지금은 40줄에 접어든 이미숙도 비슷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이미숙의 경우는 위페르와는 달리 기존의 이미지를 지키는 대신 나이가 들면서 성숙함이 득이 된 쪽이지만요. 뭐, 그런 것도 좋죠.

<스캔들>의 이미숙
하지만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부류의 배우들입니다. 금보라나 이보희 같은 사람들이죠. 이들은 젊었을 때 당대를 대표하는 미녀 스타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텔레비전에서 아줌마 역할을 하고 있지요. 나쁜 일이냐고요? 아뇨. 금보라의 경우는 방정맞은 아줌마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어요. 이보희도 그 정도면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동료 배우들에 비하면 자리를 잘 잡은 셈이고. 둘 다 이전의 미모를 잃은 것도 아니고요.

문제는 웬만큼 나이를 먹은 여자배우들에게 아줌마 역은 피할 수 없는 함정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줌마는 근사한 연기 도전 대상이긴 합니다.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것은 캐릭터가 아닌 틀입니다. 그것도 다양성을 제한하는 하나의 틀이지요. 젊을 때는 나름대로 개성을 인정받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하나의 좁은 틀에 밀려들어가는 거죠. 텔레비전을 보다보면 이런 전형성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극을 하는 것밖엔 없습니다. 어이가 없죠? 세상은 세월이 흐르며 더 나아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한국 영화계나 텔레비전 세계에서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여자 배우가 의미 있는 비중의 역을 맡을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의 경우는 영화보다 조금 낫긴 한데, 그 역들의 폭도 극도로 제한되어 있죠.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줌마 아니면 죽음을 달라’입니다. 주연을 맡기 위해서는 일단 아줌마가 되어야 해요.

나이가 들면 어떤 역을 맡을까?
한 구멍만 죽어라 파는 텔레비전 문화를 탓하는 건 쉽습니다. 특정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에 기인한 뻔한 역들과 이미지들이 반복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과연 그쪽에만 책임이 있을까요? 결국 이건 보다 넓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나이든 여자 배우들에게 다양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실제 세계의 여성들이 사는 삶의 영역이 그만큼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좁으면 세상의 반영인 예술작품의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지요.

앞으로 어떻게 세상이 바뀔지 모르겠군요. 지금 임수정이나 문근영 같은 한국의 젊은 배우들이 마주하고 있는 세계는 그들의 선배들이 경험한 세계와는 다릅니다. 고소영이나 장진영, 이영애와 같은 30대 배우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도 이전과 다르고요. 운이 좋다면 그들이 앞으로 맡을 역할들의 폭은 더 넓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세상이 먼저 바뀌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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