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 없는 청각장애인 영화 <터치 더 사운드>
전 타악기 주자 이블린 글래니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터치 더 사운드>의 감독 토마스 리델샤이머에게 유감 있습니다. 영화가 싫었냐고요? 절대 아닙니다. 며칠 전에 EBS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그 영화를 보았는데, 좋은 영화였어요.
전 타악기 주자 이블린 글래니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터치 더 사운드>의 감독 토마스 리델샤이머에게 유감 있습니다. 영화가 싫었냐고요? 절대 아닙니다. 며칠 전에 EBS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그 영화를 보았는데, 좋은 영화였어요. 아름답기도 했고요. 전 그가 그런 영화를 만든 것에 대해 일단 고맙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사후처리입니다. 미국에서 그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요. 상영되는 극장에서 청각장애인용 캡션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죠. 청각장애인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데도 청각장애인들에게 전혀 배려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적어도 프린트 하나는 그에 할애해도 되었을 법한데 말이죠. 리델샤이머의 변명에 따르면, 자막이 달리면 자기가 공들여 만든 화면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랍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DVD를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DVD에도 캡션은 수록되어 있지 않았답니다.
리델샤이머의 주장은 어처구니없습니다. 어차피 그 영화가 해외에서 상영되려면 자막을 달아야 합니다. 이번 EBS 상영본도 당연히 한국어 자막을 달고 있었지요. 심지어 감독의 모국인 독일에 상영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더빙도 있지만 그건 자막보다 다큐멘터리의 질감을 더 심하게 망칩니다. 아마 그는 그것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자막은 의사전달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필요악이에요. 그걸 청각장애인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게 뭐 그리 나쁜 일이라고요? DVD의 경우는 필요 없다면 그냥 자막을 없앨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서비스를 하지 않았죠. 오기인가? 전 모르겠습니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이블린 글래니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물론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보여지는 방식에 대해 신경 쓸 권리가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식이니까요. 하지만 창작자의 권리는 어디까지 허용이 되고 어디까지가 당연한 걸까요? 물론 자막은 영화의 화면 균형을 깨트립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청각장애인들의 감상에 도움이 된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왜 영어권 청각장애인들은 외국인 관객들이 당연히 가지는 그 권리를 거부당하는 걸까요? 로저 이버트도 지적했지만, 베리만과 오즈와 같은 거장들이 자막을 견딘다면 왜 리델샤이머라고 견디지 말아야 하는 걸까요?
리델샤이머의 이런 선택이 거북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런 태도가 영화의 주제와도 아주 잘 맞는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청각장애인이면서 온몸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블린 글래니라는 예술가 자체가 리델샤이머의 순수함에 대한 집착과 모순되는 걸요. 자막은 그가 의도한 구성을 망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영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줄 수도 있습니다. 음향이 중요한 영화이긴 하지만 적절한 조절을 통해 청각장애인들은 리델샤이머가 영화를 만들면서 꿈도 꾸지 못했던 새로운 작품을 볼 수도 있었어요. 요새 텔레비전에서 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음성해설 방식이 오리지널 방영분과는 또 다른 재미를 시청자들에게 안겨주는 것처럼요. 그건 그에게도 좋은 일일 수 있어요. 이 경우 통제는 오히려 영화의 감상 가능성을 제한합니다.
여기서 생각은 리델샤이머와 글래니를 떠나 끝없이 연장되고 확장될 수 있습니다. 바흐의 음악은 늘 바흐가 지정한 대로만 연주되어야 하는 건가요? 자식들은 늘 부모의 기대에 따라 자라야 하는 걸까요? 우리의 후손들은 꼭 우리가 기대하는 나라만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요? 그것이 자신의 작품이건, 자식들이건, 국가의 미래이건,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것을 꿈꾸는 것 자체도 좋은 일은 아니죠. 통제를 기대하는 당사자들에게나 거기서 빠져 나오려 발버둥치는 대상들에게나.
하지만 그래도 기준은 있습니다. 리델샤이머는 지나쳤지만 정반대인 방치가 세상엔 더 많죠. 예를 들어 전 이번 주를 부천과 EBS 영화제를 오가며 보냈는데, 프로젝터를 제대로 조절 못해 화면이 엉망이 된 상영회를 세 차례나 접했습니다. 설마 이것도 ‘창조적 변형’이 될 수 있는 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