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이번 시즌 호러 영화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랑>이 가장 먼저 나왔고 <아파트>가 뒤를 이었지요. 전 이번 주에 <어느 날 갑자기 - 4주간의 공포> 시리즈의 1부인 <2월 29일>을 봤습니다. 다음 주엔 2부인 <네 번째 층>을 볼 예정이에요. 그와 동시에 일본 호러 영화들도 비슷한 속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환생>, <착신아리 파이널>, <사이렌>... 내일은 <유실물> 시사회군요.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아직 보지 않은 <네 번째 층>이나 <유실물>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하지만 본 영화들에 대해서는 꽤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까지 대단한 영화들이 아니라는 거죠. 물론 이들의 성취도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전 그래도 <아파트>가 <아랑>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죠. 전 <환생>의 완성도가 <주온> 시리즈에 비해 아주 크게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의견이 다른 분들이 많을 거고. 하지만 그 자잘한 의견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번 시즌 초는 시원치 않아요.
물론 벌써부터 기대를 접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영화들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예를 들어, 작품을 직접 보진 않았지만 <코마>는 꽤 재미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패한 영화들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실패한 것도 아니에요. 둘 다 비슷한 수준으로 실패한 영화라고 해도 저에겐 한국 영화들이 조금 더 나아보입니다.
<사이렌>이나
<착신아리 파이널>과 같은 작품들은 그냥 영화 만드는 행위 자체를 포기한 것 같아요. 중간에 자기 발이 걸려 넘어지긴 했어도
<아랑>같은 영화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성의 정도는 보여줬죠.
여기에서 어떤 무리한 일반화를 시도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죠.
<링> 이후 쏟아져 나온 아시아 호러 영화들의 스펙트럼은 처음부터 굉장히 좁았고 오래 전에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데도 계속 비슷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관객들과 평론가들은 몇 년째 불평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제작자들은 긴 머리 여자 유령이 나오는 복수담을 만듭니다. 거기서 벗어난 각본들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어려운 모양인가 봐요. 하긴 아무리 사람들이 욕해도 장사가 되니 그러는 거겠지만요. 어떻게 보면 고루하고 뻔한 연애담이라고 늘 욕먹는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겁니다. 피드백과 인기가 일치하지 않는 거죠.
올해는 그래도 작년보다 전형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꽤 있습니다. <코마>와
<어느 날 갑자기>는 모두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고 있죠. 설정만 본다면
<스승의 은혜>는 고전적인 슬래셔 영화로 돌아가는 것 같고요.
<전설의 고향-쌍둥이자매비사>는 작정하고 뿌리로 돌아가려고 하고요. 장르 경계선 실험을 하는
<아랑>과 같은 영화들도 있고요.
하지만 한계는 여전히 보입니다. 이들의 ‘실험정신’은 모두 외부에서 촉발된 것들이에요. 자연스럽게 장르적 사고를 통해 내부에서 터져 나온 게 아니라, ‘이건 다들 안 된다니, 반대로 해보자’의 논리로 새 이야기와 소재를 고르는 거죠.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장르는 기계적인 사고로 쉽게 돌파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기계적 사고는 장르에 안존할 때나 필요합니다.
뭐, 그래도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합시다. 언제까지 이러지는 않겠죠. 제가 비교대상으로 든 ‘뻔한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들도 요샌 슬슬 소재 폭을 넓혀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이런 진부한 반복도 나쁜 게 아니에요. 쌓이다 보면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 수도 있거든요. 그게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아직 우리나라 호러 장르는 젊습니다. 적어도 일본보다는 젊어요. 그리고 제대로 된 젊은이들이 선배들의 진부함에 끌려가기만 하는 일은 거의 없죠. 문제는 우리가 과연 얼마나 제대로 된 젊은이인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