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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조폭 영화를 볼 때의 불편함

며칠 전에 <아치와 씨팍> 시사회에 갔다 왔는데, 그렇게 좋은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같이 갔던 제 동행은 견뎌내지 못하고 중간에 나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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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치와 씨팍> 시사회에 갔다 왔는데, 그렇게 좋은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같이 갔던 제 동행은 견뎌내지 못하고 중간에 나가더군요. 보통 때는 아무리 재미없게 본 영화라도 엔드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인데도 말이죠. 저 역시 그렇게 편하게 보지는 못했어요.

영화가 나빴나? 꼭 그렇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만족스러웠어요. 자기 스타일도 있는 영화였고. 문제가 있다면 영화의 내용이 그냥 불쾌했다는 것이었죠.

왜 불쾌했느냐고 물으시겠죠? 욕설과 폭력 때문에?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욕설 없이는 대사를 이어갈 수 없는 얼간이들이 주인공이고 수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죽거나 팔다리를 잃거나 폭발하는 영화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너무 간단하군요. 피터 잭슨의 팬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간단한 답을 내놓으면 그건 사실을 떠나 위선이죠.

그렇다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치와 씨팍>은 호모포비아나 성차별적 언동의 진열대와 같은 영화예요. 특히 호모포비아에 대해서 이야기 시작하면 책 하나는 쓸 수 있을 정도죠. 공공연한 게이인 지미도 그렇지만 이 영화의 악당인 보자기 갱들도 그냥 보기 어렵죠. 성적으로 거세당했고 어린아이처럼 가는 목소리로 지껄이는 작고 파란 괴물들이니까요. 이성애자 남자들이 별다른 고민 없이 만들어 써먹을 만한 게이 상징이죠. 그러나 이 역시 너무 단순해요. 이런 행동을 할 만한 얼간이들을 이런 행동을 하게 하는 것 자체만 가지고 뭐랄 수는 없으니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

진짜 이유가 뭐였느냐고요? 태도였어요. 성차별적이고 호모포비아적인 언동을 당연하게 생각해서? 아뇨, 그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해요. 진짜 짜증 났던 것은 이런 행동을 비주류적이고 쿨하고 남들이 잘 못할 정도로 과격한 어떤 것이라고 믿는 티가 팍팍 났다는 거죠. <아치와 씨팍>의 폭력과 욕설은 결코 비주류적이 아니에요. 반대로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은 화가 날 정도로 주류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용감하거나 창의적일 필요는 없어요. 시스템 자체가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고 이런 강도의 이야기야 포털 사이트의 답글만 긁어도 충분히 찾을 수 있죠. 바로 그런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그런 내용의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그건 그렇게까지 건강한 반응이 아니에요. 뭔가 심하게 잘못된 거죠.

여기서 몇 년 전부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양아치/조폭 영화에 대한 이 나라 사람들의 열광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아뇨, 전 모든 영화를 묶어서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몇 개월 전에 본 <사생결단>은 몇몇 단점이 있지만 부인할 수 없게 잘 만든 영화였어요. 몇 주 전에 본, 제목마저도 노골적인 <양아치어조>는, 비록 제가 러닝 타임을 그렇게 잘 견딘 작품은 아니었지만, 의미 있는 드라마였고 흥미로운 인류학적 보고서였어요. 본 사람들 말에 따르면, 얼마 전에 개봉한 <비열한 거리>도 괜찮다고 하더군요. 전 조인성이 슬로우 모션으로 방방 뛰는 티저 예고편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 해 한동안은 볼 생각이 없지만요. 하여간 문제는 개별 영화의 질이나 내용, 주제가 아니라 그런 게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죠.

물론 사람들은 온갖 지저분한 폭력과 금기에 매료되지요. 그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걸 생각해보셨어요? 조폭 영화나 더 하위인 양아치 영화가 그리는 폭력은 모두 극도로 체제순응적이죠. 이런 영화들은 폭력과 욕설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계의 묘사예요. 물론 좋은 드라마라면 이런 체제순응적인 시스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릴 수도 있겠고 바로 정반대 방향의 역습을 그리기 위해 그런 배경을 이용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영화의 의미가 아니라 그런 영화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태도예요. 한동안 등장했던 조폭 코미디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거기서 어떤 것을 취했던 걸까요?

전에도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 있는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도 같은 부류예요. 왜 우리나라에는 용의자에 대한 경찰의 폭력을 코미디 소재로 삼는 영화가 이렇게 많을까요? 개별 영화들이야 모두 다 이유가 있죠. 하지만, 전체로 놓고 보면 어떨까요? 왜 관객들은 그게 당연히 우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고문 장면만 해도 결코 그렇게 웃기만 하라고 만든 코미디는 아니었는데?

역시 분명한 답을 내리긴 어렵죠. 너무나 공공연하고 주류적인 일상의 폭력을 소수의 특별한 것인 양 위장하고 아무런 반성 없이 거기에 빠지는 이 태도가 한국 관객들의 정신 상태와 연결되어 있고 그게 결코 건강하지 못하다는 건 분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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