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S 라인'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다

제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본 가장 우스꽝스러운 신문 기사 제목은 “임수정, ‘아찔한 S 라인’ 뽐낸다”였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주연을 맡고 있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상체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나 봐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제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본 가장 우스꽝스러운 신문 기사 제목은 “임수정, ‘아찔한 S 라인’ 뽐낸다”였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주연을 맡고 있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상체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나 봐요. 설정상 어깨나 등을 잠시 보여주는 거죠. 그 뒤에 한 차례 노출 장면이 더 있는 모양이고.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요? 그건 이렇습니다. 그 기사가 나갈 때 임수정은 아직 촬영도 들어가기 전이었어요. 물론 기자가 임수정의 몸매가 ‘S 라인’인지 확인할 수도 없었고요. 게다가 임수정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캐릭터에 맞추기 위해 몇 달 걸리는 고구마 다이어트에 들어갔으니 최종 노출 장면 때 드러날 그 사람의 몸매가, 요새 매스컴이 습관적으로 외쳐대는 ‘S 라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죠. 그건 영화의 홍보 담당자들도 알고 있었고 기자들도 알고 있었으며 정보 빠른 독자들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기자들은 ‘S 라인’이라는 표현을 무조건 끌어들였어요.

뭐, 사실 거짓말은 아니죠. 문소리 말마따나, 모든 여자들에게는 S 라인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 라인에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건 사실 기본이 되는 골격이고, 지금까지 홍보 대상이 아니어서 그렇지 임수정의 골격은 꽤 예쁜 편이거든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내뱉는 ‘S 라인’이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기사에서 ‘S 라인’이라는 단어는 제공하려는 정보와 상관없이 순전히 독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투입되었죠.

요새 인터넷에서 비슷한 기능을 하는 단어로는 ‘초미니’가 있죠. 물론 이 단어도 거짓말은 아니에요. 우선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죠. 원래 그런 말이 있어요. 마이크로스커트라고도 하고 데미미니라고도 하죠. 많은 연예인이 그런 걸 입고 다니는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건 집착이 돼요. 더 이상 ‘어떤 연예인이 마이크로스커트를 입었다’라는 정보는 중요하지도 않죠. 정말로 중요한 건 ‘초미니’라는 단어죠.


언젠가부터 인터넷 사용자들은 단어와 섹스를 하고 있어요. ‘S-라인’이나 ‘초미니’와 같은 단어는 이제 공공연한 페티시의 영역에 도달했죠. 여기서 실체(그런 게 무엇이건)는 중요하지 않아요. 심지어 그 단어가 사용자들을 유혹해 끌어들이려는 궁극적인 목적인 사진이나 기사들도 중요하지 않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단어를 타이핑하는 데에 더 큰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하긴 그럴 만도 하겠어요. 제대로 된 포르노 이미지를 만들려면 상당한 노력과 재능과 돈이 들어가요. 음란물을 쓰는 것도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고. 하지만 이 경우는 그냥 단어만 내뱉으면 돼요. 그럼 포르노까지는 아니더라도, 순식간에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자극적이고 섹시한 무언가가 만들어지죠. 아무리 그것이 기성품이고 따분하고 실체 없는 것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사람들은 뱉어야 해요.

이건 사람들이 추임새처럼 문장 사이에 넣는 육두문자와 같죠. 사실 더 이상 욕 기능도 하지 못하고 내용상 쓸모도 없지만 그래도 그냥 넣어야 해요. 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의 차려야 하는 장소에 몇 시간 동안 갇혀 있어야 했던 한 무리의 남자애들을 본 적 있는데, 그동안 그 애들은 정말 미쳐 죽으려 하더군요. 이런 게 마약이 아니라면 뭐가 마약인지?

‘S-라인’ 같은 단어가 남발되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죠. 유행어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고, 이런 단어들도 선배들처럼 한 번 쓸려왔다가 파도처럼 다시 쓸려나가겠죠. 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이전이라고 해서 우리가 늘 결백한 언어의 정수만 사용했던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단어와 개념에 얼마나 수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의 단어가 일단 반복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세뇌당하는 걸까요? 그것이 개념이라면? 문장이라면? 선언이라면?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과연 주체성 비슷한 것이 있는 걸까요? 여러분이 직접 머리를 써서 만들어냈다고 믿는 의견이 정말 자기 의견인지 어떻게 아나요? 그게 주체성과 의지가 있는 두뇌가 만들어낸 의미 있는 산물이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고?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5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나를 살리는 딥마인드

『김미경의 마흔 수업』 김미경 저자의 신작.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절망과 공허함에 빠진 이들에게 스스로를 치유하는 말인 '딥마인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정한 행복과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는 자신만의 딥마인드 스위치를 켜는 방법을 진솔하게 담았다.

화가들이 전하고 싶었던 사랑 이야기

이창용 도슨트와 함께 엿보는 명화 속 사랑의 이야기. 이중섭, 클림트, 에곤 실레, 뭉크, 프리다 칼로 등 강렬한 사랑의 기억을 남긴 화가 7인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남긴 감정을 살펴본다. 화가의 생애와 숨겨진 뒷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현대적 해석은 작품 감상에 깊이를 더한다.

필사 열풍은 계속된다

2024년은 필사하는 해였다. 전작 『더 나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에 이어 글쓰기 대가가 남긴 주옥같은 글을 실었다. 이번 편은 특히 표현력, 어휘력에 집중했다. 부록으로 문장에 품격을 더할 어휘 330을 실었으며, 사철제본으로 필사의 편리함을 더했다.

슈뻘맨과 함께 국어 완전 정복!

유쾌 발랄 슈뻘맨과 함께 국어 능력 레벨 업! 좌충우돌 웃음 가득한 일상 에피소드 속에 숨어 있는 어휘, 맞춤법, 사자성어, 속담 등을 찾으며 국어 지식을 배우는 학습 만화입니다. 숨은 국어 상식을 찾아 보는 정보 페이지와 국어 능력 시험을 통해 초등 국어를 재미있게 정복해보세요.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