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좋은 영어 발음'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전 소위 ‘좋은 영어 발음’이라는 것에 대해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도대체 ‘좋은 발음’이 뭐예요? 여러분이 ‘영어 발음이 좋네’라고 말할 때는 그 뜻이 뭔가요? 우리가 듣기에 미국식, 또는 영국식 영어와 비슷한 것인가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얼마 전에 <보이지 않는 물결>을 봤어요. 강혜정이 조연으로 나오는 펜엑 라타나루앙의 신작이지요. 재미있었어요. 프란츠 카프카와 자크 타티 사이에 놓인 밍밍한 블랙 코미디를 상상해 보세요.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보다 더 좋은 영화라고는 못하겠지만 사람에 따라 더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일 수도 있겠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오늘 이야기하려는 건 이 영화에서 강혜정이 보여준 연기예요.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영어 연기’죠. 어땠느냐고요? 안 좋았어요. 정말 안 좋았어요. 한 사람을 연달아 계속 패는 것 같아서 맘이 편치 않지만 할 말은 해야죠. 여기 어떤 감정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이 영화에서 강혜정의 대사는 거의 모두 영어예요. 당연하잖아요. 마카오와 푸켓이라는 지리적 환경에서 다양한 외국인들과 의사소통하는 캐릭터니까요. 강혜정 영어 실력이 어떠냐고요? 그게 좀 까다로워요.

영화 속에서 강혜정의 영어 실력은 그렇게 좋지 못해요. 하지만 그것 자체는 단점이 될 수 없어요. 그 사람 캐릭터 ‘노이’는 그렇게까지 유창한 영어 실력을 과시할 필요는 없거든요. 노이라는 이름이 조금 알쏭달쏭하긴 하지만 그 사람은 한국인으로 설정되어 있어요. 아마 고등교육은 받지 않은 것 같고 꽤 오랫동안 동남아 부근에서 살아온 것 같더군요. 이런 사람은 메릴 스트립처럼 말하지 않아요. 적당히 문법도 틀리고 관사도 빼먹는 브로큰 잉글리시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익히게 마련이죠. 그것도 잘 활용하면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죠. 펜엑 라타나루앙의 전작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도 그런 브로큰 잉글리시의 느낌을 효율적으로 살린 영화였어요.

하지만 강혜정은 그쪽으로 나가지 않았어요. 필사적으로 잘하려고 기를 썼지요. 강혜정의 연기는 대부분 버터 바른 듯 미끌미끌 굴러가는 미국식 영어의 흉내예요. 거기에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Hmmm... I see...”와 같은 가벼운 대사도 뒤에 이어지는 문장과 묶어 통째로 한꺼번에 외워 뻣뻣하게 전달해버리죠. 굉장히 듣기 어색해요. 영어 학원 수강생이 교과서 읽는 것 같아요. 연기가 망가지는 건 당연해요.

여기서 전 소위 ‘좋은 영어 발음’이라는 것에 대해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도대체 ‘좋은 발음’이 뭐예요? 여러분이 ‘영어 발음이 좋네’라고 말할 때는 그 뜻이 뭔가요? 우리가 듣기에 미국식, 또는 영국식 영어와 비슷한 것인가요?

영어의 표준 억양은 존재하지 않아요. 수많은 나라에서 자기식의 억양을 빌려 영어를 쓰고 있죠. 휴 그랜트는 빌 클린턴과 다른 억양으로 이야기하고 빌 클린턴과 메릴 스트립의 억양도 같지 않죠. 수많은 인도 사람들이 영어를 모어로 쓰고 있는데, 그들의 억양 역시 위에 언급한 사람들과 다르죠. 싱가포르와 필리핀, 뉴질랜드, 호주와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우리는 필사적으로 미국식 표준 억양에 매달려요. 뭔가 더 배울 시간에 죽어라 굴러가는 R 발음을 익히느라 기를 쓰는 거죠. 그게 너무 걱정되어서 <여섯개의 시선>에 나오는 박진표의 <신비한 영어 나라>에서처럼 아이들의 R 발음을 살리기 위해 애들 설소대를 절단하는 부모들까지 나오는 거죠. 어이가 없어요. 정말 아무 짝에서 쓸모없는 짓이거든요.

여기엔 좀 심각한 문제가 숨어 있어요. 언어란 기본적으로 도구죠. 우리가 언어를 익히는 건 세상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로부터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예요.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는 계급적인 의미가 있어요. 미국식으로 R 발음을 미끌미끌 더 잘 굴리면 내용과 상관없이 ‘영어 발음이 좋은’ 사람이 되고 그 결과 사회적 계급 점수가 올라가죠. 종종 언어의 도구적 가치보다 R 발음 굴리기가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심각한 거죠.

<보이지 않는 물결>엔 영어 대사를 구사하는 수많은 배우들이 있어요. 툰 히라나숲이나 마리아 코르데로처럼 영어가 유창한 배우도 있고 아사노 타다노부처럼 더듬더듬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관광지 영어를 거칠게 구사하며 뛰어다니는 엑스트라들도 있어요. 여기서 강혜정이 배워야 했던 건 아사노 타다노부의 영어였어요. 그의 영어는 완벽하지 않고 일본어 억양도 강하게 남아 있어요. 하지만 그의 대사는 체화되어 있었고 연기에 방해되지도 않았죠. 왜냐하면 그의 영어는 장식이 아니라 도구였기 때문이에요. 적어도 언어에서는 언제나 도구적 가치가 먼저예요. 그 순서가 바뀌면 뭔가 잘못된 거예요.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8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산업의 흐름으로 반도체 읽기!

『현명한 반도체 투자』 우황제 저자의 신간. 반도체 산업 전문가이며 실전 투자가인 저자의 풍부한 산업 지식을 담아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각 산업들의 흐름 속에서 읽어낸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산업별 분석과 기업의 투자 포인트로 기회를 만들어 보자.

가장 알맞은 시절에 전하는 행복 안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작가 김신지의 에세이. 지금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들, ‘제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1년을 24절기에 맞추며 눈앞의 행복을 마주해보자. 그리고 행복의 순간을 하나씩 늘려보자. 제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2024년 런던국제도서전 화제작

실존하는 편지 가게 ‘글월’을 배경으로 한 힐링 소설. 사기를 당한 언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 편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모르는 이와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진실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주는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

나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질적 부나 명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나 자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심리학은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다. 요즘 대세 심리학자 신고은이 돈, 일, 관계,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위해 따뜻한 책 한 권을 펴냈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