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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어휘의 부족이 야기하는 부작용

결국, 이 모든 건 상상력과 어휘의 부족이 현실 세계에 얼마나 큰 부작용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제대로 된 선을 행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면 세상일들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잡고 직간접적인 모든 경험을 통한 충분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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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의 공식>을 보고 왔는데, 불필요하게 정신분석에 빠져 있고 프랑스 예술영화 냄새가 너무 나는 걸 빼면 좋은 영화였어요. 사실 그것들도 영화의 장점이기도 했고. 이런 건 쉽게 장단점을 구별하기 어렵죠.

영화에서 진짜로 거슬리는 것이 두 개인가 있었어요. 하나는 포스터에 박혀 있는 굉장히 노골적인 맞춤법 오류였는데, 인쇄까지 다 끝난 모양이니 고치기는 이미 늦었겠죠. 하긴 오타와 맞춤법 때문에 늘 게시판 회원들을 무보수 베타 테스터로 동원하는 저 같은 사람이 뭐랄 일도 아니고.

다른 하나는 대사와 개념 문제였어요. 여기서 19세 소년을 연기하는 온주완은 김호정이 연기하는 고등학교 음악선생에게 연정 비슷한 걸 품는데, 그 상황에서 좀 괴상한 대사가 나옵니다. “손으로 자위행위를 해주세요.” 정확한 대사는 아닌데, 적어도 개념은 이런 것이었어요. 몇 초 동안 ‘이게 뭔 소리야?’ 하고 궁금해 했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스터리가 벗겨지더군요. 온주완이 알몸으로 누워 있는 동안 김호정이 핸드잡을 해주더라고요. 기자 간담회에서 이 장면 이야기가 나왔고 온주완도 여기에 대해 몇 마디 했는데, 인터넷을 검색해보시면 “자위 연기 사실 어려웠어요” 식의 제목을 단 기사를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제목 자체는 영화 내용만 따지면 그렇게 잘못된 게 아니죠. 온주완이 김호정의 속옷을 가지고 자위행위 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하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완전히 잘못되었어요. 김호정과 온주완이 한 건 자위행위가 아니에요. 그냥 ‘두 사람이 하는’ 섹스지. ‘자위행위를 받는다’라는 표현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자위행위는 받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한테서 무언가를 받으면 그건 벌써 ‘자위’가 아닙니다.

이런 건 차라리 영어로 이야기하는 게 편하죠. 해외 영화제에서 영어 자막으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에겐 개념의 혼란 따위는 없었을 거예요. 사실 감독도 이 대사 때문에 고민 좀 했을 것 같군요. 우리말로 정확한 표현은 없으니까요. 결국 택한 게 ‘자위행위를 해준다 또는 받는다’라는 괴상한 표현인데, 그게 실수고 잘못된 표현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핸드잡을 가리키는 일상화된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할까요? 네, 상당히 중요해요.

일단 실용적인 문제를 들 수 있죠. 30대 유부녀에게 핸드잡을 받고 싶어하는 소년이 오해없이 정확한 자기 의사를 전달하려면 보편화되고 명확한 표현이 필요하잖아요. 섹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늘어날수록 의사전달이 명확해지고 난처한 상황에 빠질 위험성이 줄어들며 만족도도 증가합니다. 성생활이 다채로워지는 건 당연하고요. 제가 김호정이고 온주완한테 “자위행위 해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면 무슨 짓을 했을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하군요.

둘째는 개념의 문제예요. “자위행위를 해주세요”라는 대사의 심각함은 섹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념 착오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요. 섹스 행위에 성기 삽입만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세상엔 (자위행위를 포함해) 수많은 형태의 섹스가 존재하고 성기 삽입은 가장 따분하고 전형적인 방법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걸 인식하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성범죄와 성폭력이 이 어설픈 개념 적용 때문에 제대로 처벌되지 못하고 있죠. 대한민국 법률가들이 쓸데없이 ‘유사성행위’라는 불필요한 단어나 만들어가며 낭비하는 시간에 단어 정리만 제대로 해도 일들은 훨씬 손쉽게 끝날 거예요.

결국, 이 모든 건 상상력과 어휘의 부족이 현실 세계에 얼마나 큰 부작용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례일 뿐입니다. 제대로 된 선을 행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면 세상일들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잡고 직간접적인 모든 경험을 통한 충분한 상상력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섹스 역시 예외는 아니죠. 아니, 특히 섹스에서 더 중요하겠군요. 이 영역엔 빈약하기 짝이 없는 허술한 일상어와 의도적으로 지저분한 어휘들로 구성된 음담패설의 집합밖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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