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가장 올바른 반응

그런 상인 줄 알면서도 정작 수상 결과가 발표되면 상은 이 영화 대신 저 영화에게 가야 했다고 또 투덜거리는 거죠. 이미 아카데미상이 어떤 행사인지 규정해놓고서도 자기 맘에 드는 결과를 바라는 겁니다. 엄청 이중적이지 않습니까?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났습니다. 고만고만한 영화들이 적당히 모여 있던 해라 대단한 서스펜스나 반전은 없었습니다. 모두 기분 좋게 상을 받고 기분 좋게 갔지요. 마지막 작품상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문제는 작품상이었죠. 다들 탈 거라고 생각했던 <브로크백 마운틴> 대신 <크래쉬>가 받았으니까요.

그게 그렇게 뜻밖이었을까요? 아뇨. <크래쉬>가 작품상을 탈 거라는 예측은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언자는 시카고 선 타임즈의 로저 이버트죠. 그는 믿어도 될 만한 사람입니다. 경험이 많고 적중률도 높거든요.

그래도 사람들 맘이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벌써부터 <크래쉬>라는 영화에 상을 준 것에 불만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케네스 튜런 같은 경우는 노골적인 동성애 영화인 <브로크백 마운틴>에 상을 주기 싫고 그렇다고 양심에 찔리기도 싫은 사람들이 적당히 선택한 작품이 <크래쉬>라고 비꼬았습니다. 이버트는 그에 대해 <크래쉬>가 상을 탄 건 이슈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더 좋은 영화였기 때문이라도 맞받아쳤고요.

어느 쪽이 옳을까요? 다들 조금씩 옳고 조금씩 틀립니다. 물론 케네스 튜런이 제시한 사고 과정을 밟아 투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버트가 생각한 것처럼 단순히 <크래쉬>가 더 좋은 영화라고 생각되어서 투표한 사람들도 있었을 거고요. 튜런이나 이버트나 저나 그 퍼센트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아카데미상과 같은 인기투표의 특징이죠. 수상 결과에 분명한 의견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동양 감독인 이안의 작품이기 때문에 인종주의를 의심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특히 이런 의심은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권 사람들에겐 더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안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탔습니다. 아카데미가 감독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거죠. 그 정도로 충분치 않습니까? 오히려 이번 게임에서 이안은 언제나 우위였습니다.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의 감독 폴 하기스가 감독상을 받지 못했던 건 그가 상대적으로 무명이었기 때문이겠죠. 하기스와는 달리 이안은 존경받은 일급 명사이고 훌륭한 필모그래피를 보유하고 있으며 안 주면 괜히 미안할 만큼 동글동글한 매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인종 카드가 들어가 봐야 얼마나 들어갔겠어요? 거의 안 들어갔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아카데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좀 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카데미의 성격을 비판합니다. 지나치게 상업적이다, 지나치게 주류 할리우드적이다,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그런 상인 줄 알면서도 정작 수상 결과가 발표되면 상은 이 영화 대신 저 영화에게 가야 했다고 또 투덜거리는 거죠. 이미 아카데미상이 어떤 행사인지 규정해놓고서도 자기 맘에 드는 결과를 바라는 겁니다. 엄청 이중적이지 않습니까?

웃기는 건 그 규정된 이미지 자체도 그렇게까지 정확하지 않다는 겁니다. 네, 아카데미상엔 보수적이고 안전한 경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꾸준히 예외적인 결과도 나왔고 종종은 관객들의 기대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카데미가 하나의 성격만 고수하는 상이라면 이 상의 역사에는 예외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아카데미에 대한 가장 올바른 반응은 ‘그 쪽은 그러려니’하고 시상결과를 하나의 자료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카데미상을 받았다고 나쁜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받지 않는다고 좋은 영화가 영원히 묻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냥 업계 행사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놈의 상이 가진 상징성과 그와 고정된 선입견이 버리기엔 너무 크죠. 덕택에 매년 있는 행사는 짜고 치는 고스톱 비슷해집니다. 비판이랍시고 뻔한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들에 점점 지쳐가는 것도 당연합니다.

참,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한 가지 물어봅시다. 요새 인터넷 게시판 사용자들이 할리우드나 아카데미를 비판할 때 당연한 진리처럼 써먹는 괴상한 반유태주의 비슷한 것의 정체는 뭡니까? 영화 게시판에 가보면 ‘보수적인 할리우드 유태인’이 영화 세상의 악의 축이라도 되는 것 같습니다. 보면 그냥 어이가 없어요. 이 주장에 따르면 할리우드의 유태인들은 모두 변장한 시오니스트들이면서 WASP 문화의 절대 수호자이고 미국에 리버럴한 유태인은 노엄 촘스키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건 심지어 반유태주의적인 감정을 가진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의 고정관념과도 별로 닮은 구석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다가 총을 쏘아대는 건지. 그 총에서 나가는 건 도대체 뭔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5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산업의 흐름으로 반도체 읽기!

『현명한 반도체 투자』 우황제 저자의 신간. 반도체 산업 전문가이며 실전 투자가인 저자의 풍부한 산업 지식을 담아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각 산업들의 흐름 속에서 읽어낸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산업별 분석과 기업의 투자 포인트로 기회를 만들어 보자.

가장 알맞은 시절에 전하는 행복 안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작가 김신지의 에세이. 지금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들, ‘제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1년을 24절기에 맞추며 눈앞의 행복을 마주해보자. 그리고 행복의 순간을 하나씩 늘려보자. 제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2024년 런던국제도서전 화제작

실존하는 편지 가게 ‘글월’을 배경으로 한 힐링 소설. 사기를 당한 언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 편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모르는 이와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진실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주는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

나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질적 부나 명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나 자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심리학은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다. 요즘 대세 심리학자 신고은이 돈, 일, 관계,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위해 따뜻한 책 한 권을 펴냈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