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후한’ 중년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적어도 전 지난 십여 년 동안 ‘중후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중년 남자 또는 여자들을 본 적이 없어요. 그건 실재하는 게 아니라 소설책에서나 나오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관념입니다.
혹시 주변에서 ‘중후한’ 중년을 보신 적 있습니까? 있어도 아주 드물었다는 데 내기를 걸어도 좋습니다. 적어도 전 지난 십여 년 동안 ‘중후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중년 남자 또는 여자들을 본 적이 없어요. 그건 실재하는 게 아니라 소설책에서나 나오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관념입니다.
왜냐고요? 그건 우리나라의 중년들은 중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아저씨/아줌마 문화 때문이죠. 그들은 위엄을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쿨할 필요 자체가 없죠. 아저씨/아줌마가 된다는 건 젊은이들이 억지로라도 갖추어야 하는 가식에서 해방된다는 뜻도 됩니다. 이게 언제부터 형성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예의나 매너, 이미지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한국 중년들의 문화가 하향평준화된 건 사실입니다.
아저씨/아줌마 문화는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가식과 불필요한 예의는 갑갑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과연 그 문화가 우리에게 준 게 해방과 자유일까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아저씨/아줌마 문화는 상식적인 예절보다 훨씬 은밀하고 폭압적으로 내부인들을 통제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화는 집단 내부의 상호 동의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화의 바탕이 되는 건 타락한 순응주의입니다. 한마디로 일정 수준의 유치함, 조악함, 부패함, 우스꽝스러움이 같은 문화를 누리는 구성원들의 동의하에 용납되는 것이죠. 이 선 밑으로 내려가면 물론 그 사람은 응징됩니다. 재미있는 건 그 선을 넘어서는 사람들도 사회적 제약을 받는다는 거죠. 아마 그 사람은 “싸가지 없고 잘난 척하며 재수 없다”는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싸가지가 없는 게’ 살인보다 더 큰 죄입니다. 여러분이 ‘싸가지 없음’에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는 게 과연 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일반론을 말할 때, 이런 집단주의적인 사고가 위험한 건 적극적인 두뇌 활동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싸가지 없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시스템에서 적극적으로 거기에 대해 고찰할 필요는 없지요.
사실 이건 꼭 ‘아저씨/아줌마’ 문화에만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시스템 내부의 방식으로만 사고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죠. 대표적인 예로 얼마 전에 한기총은 “초대교회에서 정죄되었던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을 수용한 비역사적·반역사적 역사 왜곡”이라며 영화 버전 <다빈치 코드>의 상영중지공문을 보냈습니다. 뭐가 잘못된 거냐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하철에 들어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며 승객들을 귀찮게 구는 사람은 적어도 신념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세속국가에서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 영화 상영을 중단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들은 상식이 부족하고 IQ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럭저럭 시스템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그 정도 사고밖에 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시스템 내부의 자화자찬 속에 익숙해져 있느라 다른 식으로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뇌 세포가 죽고 시냅스가 끊긴 거죠.
이런 집단주의적 사고의 위험성은 아저씨 문화에서 특히 위험합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건 아저씨들이기 때문이죠. 대한민국은 법률이 아닌 아저씨들이 모여 만든 폐쇄적인 결사가 제정한 불문법에 의해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얼마 전에 한나라당의 최연희 의원이 동아일보 모 기자를 성추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쪽에서는 급성 알콜 중독이니 뭐니 하면서 빠져나가려 하는 모양이지만, 한국 술자리 문화가 어떤지 아는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까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는 걸 알 겁니다. 더 웃기는 건 “식당주인으로 착각해 실수를 저질렀다”라는 해명이 먹힐 것으로 생각했던 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이 모든 건 전형적인 아저씨 문화의 산물입니다. 집단의 용납 하에 자신에게 부여된 것으로 착각한 쩨쩨한 권력을 아무런 생각 없이 행사한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 폐쇄된 문화 속에서 머리가 굳을 대로 굳어 “식당 주인이면 만져도 된다”라는 변명을 당연하다는 듯이 시도한 것이 두 번째입니다. 전 두 번째가 더 소름끼칩니다. 전 사악함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건 형식적으로나마 징벌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멍청함과 아둔함은 어쩌란 말입니까?
모든 문제에서 가장 상식적인 첫 번째 해결책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속죄양으로 만들 수 있는 ‘내’가 아닙니다) 현대사회의 당연한 윤리적 기준을 따르기는커녕 이해하지도 못하는 열등한 인간들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이죠. 그걸 인정해야 제대로 된 교화와 교육이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그 교육은 지금 기획하고 있다는 ‘성교육’ 수준을 넘어서야 하겠지요. 이게 단지 성에 대한 인식에만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어림없죠. 집단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를 깨닫는 건 개인들이죠. 그리고 집단이 그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피신처를 만들어주는데 왜 개인이 귀찮게 그런 짓을 해야 합니까? “에이, 재수 없었다. 그냥 적당히 묻어가다 말자”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죠.
다음 세대는 나을까요? 설마요. 여러분도 아시잖아요.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짜증 날 정도로 집단 안에서 순응적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아무리 말로만 진보를 떠들면 뭐해요. 그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집단이 아저씨다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