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정말 슬픈 이야기
그래도 잘 알려지고 유명한 작품들은 적극적인 감상과 평론을 맞을 수 있지만, 그럴만큼 운이 좋지 못한 작품들은 결국 마케팅 부서의 감상 지도서에 갇혀 남은 평생을 보내게 되는 거죠.
<연애의 목적>은 작년에 나온 한국 영화들 중 가장 불쾌한 영화였습니다. 욕하는 게 아닙니다. 원래부터 그런 걸 의도한 작품이었으니까요. 그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이 끈적거리고 기분 나쁜 느낌을 되씹으며 극장을 나와야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영화였지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영화를 팔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마케팅 부에서는 약간의 사기를 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를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치장하는 것이죠. <연애의 목적>이라는 제목을 이용해 ‘연애의 목적’이 무엇인가?' 따위의 앙케이트 질문을 하기도 하는 식이에요. 정직하지 못한 방법이지만 이것도 효과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 영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이 예상 못한 내용에 머리를 꽝 얻어 맞는다면요.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언론의 일차적인 반응은 아주 괴상한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정말로 그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로 받아들였어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시사회 때 회사에서 나누어준 보도자료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고요.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성추행과 강간, 그 밖의 온갖 흉물스러운 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갔는데 말이죠. 둘 중 하나겠지요. 정말로 이 사람들의 감수성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둔감했거나, 그냥 생각하기 귀찮아 보도자료를 요약하는 것으로 일을 마쳤거나.
여기서 전 보도자료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전 영화일을 조금 하기 때문에 거의 매일 영화사에서 메일로 보내오는 보도자료들을 받습니다. 받고 나서 몇 시간 지나면 신문이나 인터넷 매체에 그 내용을 요약한 기사들이 실립니다. 이 과정은 그냥 기계적입니다. 영화사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으면 매체에 보도자료를 뿌리고 매체에선 그걸 생각없이 그냥 옮기는 거죠. 분석이나 사고는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하긴 뭐, 없어도 되겠죠. 그걸 읽는 사람들이 기자들의 독창적인 사고 따위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요. 매체나 독자가 필요로 하는 건 정보이고 보도자료는 그걸 제공해줍니다.
이런 보도자료들의 영향력이 항구적인 것도 아닙니다. 허풍 섞인 보도자료로 도배를 한다고 해도 안 되는 영화는 안 되는 거죠. 가끔 조금은 잘 되어야 하는 영화인데도 안 되는 영화들도 있지만. 최근작으론 <청연>이 떠오르네요. 이 영화가 온갖 무의미한 인터넷 공격을 받고 추락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영화사에서 제 이메일 편지함으로 날아드는 <청연> 관련 보도자료들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몇 개는 신문에도 실리긴 하더군요. 하지만 그게 뭐하는 짓인지. 대응을 하려면 초반에 해야지, 다 말아먹은 뒤에 뒷북을 치면 어쩌라고요. 아무리 요란하게 쳐도 뒷북은 뒷북인 겁니다.
그러나 보도자료들을 무시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소화과정을 통하지 않는 보도자료의 힘은 여전히 강해요. 이건 영화만 해당되는 건 아닙니다. 책이나 연극도 마찬가지예요. 보도자료를 받아보기 시작한 뒤로, 전 보도자료, 실제 작품, 저널리즘, 평론들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 영향력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닙니다. 심한 경우는 모범생들이 밑줄 그으며 읽는 전과 노릇을 합니다. 평론가나 기자가 그 내용을 거부한다고 해도 여전히 거부의 대상이 구심점이 되어 독서나 영화 감상의 방향을 잡아주고요. 하긴 책 읽고 영화 본 뒤 글 쓰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 그걸 쉽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잡지처럼 대충 읽어도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줄여주는데요.
보도자료가 작가나 감독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만 해도 그건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도자료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 회사와 마케팅부서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둘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가 더 많죠. 그래도 잘 알려지고 유명한 작품들은 적극적인 감상과 평론을 맞을 수 있지만, 그럴만큼 운이 좋지 못한 작품들은 결국 마케팅 부서의 감상 지도서에 갇혀 남은 평생을 보내게 되는 거죠. 생각해보니 정말 슬픈 이야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