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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혼 원정기>의 영리함

그 회피가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처럼 영리한 것이건, <하노이 신부>에서처럼 투박하고 야만적인 것이건, 결국 회피이고, 자신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비겁함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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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국제결혼을 다룬 두 편의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SBS 추석 특집극인 <하노이 신부>였고 다른 하나는 <나의 결혼 원정기>였지요. 첫 번째 작품은 베트남인 통역사과 한국인 의사, 그리고 그 통역사와 결혼하게 된 의사의 농촌 노총각 형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족 처녀와 결혼하려고 왔다가 거기 통역사와 사랑에 빠지는 시골 노총각 이야기였고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결혼은 능력 있거나 세련된 몇몇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의미가 바뀌었죠. 지금 우리가 국제 결혼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미 혼기를 놓치고 국내에서 신붓감을 구할 수 없는 남자들이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만만한 여자들을 데려오는 광경입니다. 별로 로맨틱한 모습은 아니지만 세상이 로맨틱하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죠. 앞으로 이런 걸 우린 계속 보게 될 겁니다. 세상에 그런 게 존재한다면 당연히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에 반영되기 마련이고요. <하노이 신부><나의 결혼 원정기>는 모두 그 결과물들입니다.

두 작품이 어땠냐고요? <나의 결혼 원정기>는 좋았습니다. 좋은 연애영화였고 원정결혼을 하러 간 시골 노총각들의 묘사도 솔직하고 정확한 편이었어요. 반대로 <하노이 신부>의 억지로 쥐어짜내는 멜로드라마는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노골적인 오리엔탈리즘과 이미지 착취의 느낌도 강했고요. 이게 제 주변 사람들이 다들 경고하던 SBS 드라마의 감수성인 건지, 아니면 이 작품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작품 사이엔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회피적인 작품들이라는 거죠. 모두 시골노총각의 원정 결혼 행사로 시작하고 있긴 하지만 그 시골 노총각의 국제결혼으로 끝나는 작품은 없습니다.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 로맨스는 원정결혼행사의 굴레 밖에서 벌어지고, <하노이 신부>에서 대학까지 다닌 베트남인 처녀 티브는 시골 노총각의 엄청 재수 없는 의사 동생과 맺어집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매체가 무엇이건, 이야기꾼은 전체가 아닌 개인을 다루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나름대로 ‘원정 결혼’을 테마로 잡은 영화 두 편이 모두 가장 흔한 상황, 즉 자국의 결혼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은 한국의 시골 노총각이 상대적으로 빈곤한 나라의 젊은 여자를 물건 사듯 데려와 결혼하는 설정을 외면하고 있다는 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물론 우리가 가상할 수 있는 ‘솔직한’ 원정결혼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혼시장에서 경쟁력이 낮은 남자가 남자 주인공이면 일단 잘나가는 미남 배우를 쓸 기회가 사라집니다. 노골적인 성차별과 인종차별, 오리엔탈리즘, 가정폭력 역시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될 것이고요. 또 우리 편 들기의 민족주의 편견이 있어서 그런 지저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아마 관객들이나 시청자들은 여자 쪽에 감정이입도 못할 겁니다. <하노이 신부>가 그 구질구질함의 극을 달리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던 건 티브 역을 맡았던 배우가 김옥빈이었기 때문이었을 걸요. (물론 김옥빈은 아직 잘 알려진 배우가 아니고 한국인들의 귀에 그 서툰 한국어 대사들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서 진짜 베트남인이라고 착각한 시청자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계획대로 베트남 배우를 썼어도 같은 효과가 나왔을까요?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여기서 전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회피가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처럼 영리한 것이건, <하노이 신부>에서처럼 투박하고 야만적인 것이건, 결국 회피이고, 자신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비겁함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겁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타자화시킬 수 있는 객관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우리가 툭하면 흠잡는 할리우드 영화와 비교해도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하노이 신부>보다 몇 십 년 전에 나온 <수지 왕의 세계>보다 나은 게 뭡니까? 적어도 윌리엄 홀든은 점잖고 예의바르기라도 했습니다. <하노이 신부>의 이동욱(<하노이 신부>에서 한국인 의사 역할)에서는... 말을 맙시다. 이런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동욱 캐릭터의 행동을 당연시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전 우리의 미래에 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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