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는 시간을 뛰어넘는 명작으로 남을까요?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벌써 반세기 전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슬슬 시간의 심판을 받을 때가 된 것이죠. 앞으로 이 작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톰 브라운의 학창시절]처럼 낡은 시대의 유물이 되어 잊혀 질까요?
첫 번째 작품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1950년에, 마지막 작품인 [마지막 전투]가 56년에 나왔으니,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벌써 반세기 전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슬슬 시간의 심판을 받을 때가 된 것이죠. 앞으로 이 작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톰 브라운의 학창시절]처럼 낡은 시대의 유물이 되어 잊혀 질까요?
얼핏 보기엔 전자 같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해리 포터]에 푹 빠진 인터넷 세대의 팬들에게도 어필하고 있으며 여전히 썩 잘 팔립니다. 수많은 판타지 작가들이 루이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쓰고 있으며 J.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도 그들 중 하나이죠. 디즈니에서는 [나니아 연대기]의 전 일곱 편을 영화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이번 겨울 시즌에 그 첫 편이 개봉됩니다.
그러나 역풍도 만만치 않습니다. 비판가들 중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그 역시 저명한 판타지 작가인 [황금 콤파스]의 저자 필립 풀먼이죠. [나니아 연대기]를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종교 프로파겐다에 불과하다고 밀어붙인 그의 독설은 약간 거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풀먼이 이 시리즈가 마주칠 마지막 비판가가 되지도 않을 겁니다. 심지어 지금 만들어지는 디즈니 영화 자체가 그 시리즈에 대한 비판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아요. 지금의 상식을 따른다면, [나니아 연대기] 영화는 루이스의 비전을 따라 정확하게 만들어질 수는 없습니다. 특히 후기 책들의 몇 편은 어느 정도 개작이 따를 것이며 그 개작은 루이스의 원래 버전에 대한 변명 또는 비판이 될 겁니다.
자, 그렇다면 혐의점을 하나씩 검토해보기로 하죠.
우선 가장 모호한 부분을 언급해보기로 합시다. 여성 문제 말이에요. 일단 긍정적인 면. 나니아 시리즈에는 전통적인 공주파 주인공들은 없습니다. 나니아 시리즈의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씩씩하고 주체적인 인물들이죠. 루이스는 남자들에게만 모든 액션을 맡기는 일도 없습니다. 아슬란이 여자들이 전투에 참가하는 건 보기 좋지 않다고 한 마디 하긴 하지만 후반부에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요. 이 시리즈에 속해있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의 성비가 비교적 딱딱 들어맞는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풀먼을 자극한 건 무엇일까요? 풀먼은 일단 [마지막 전투]에서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주인공들 중 한 명인 수잔을 다루는 방식을 지적합니다. 수잔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나니아 세계에서 떨어져 나오고 화장과 파티에만 신경 쓰는 멍청한 젊은 여자가 되어버립니다. 그 결과 아슬란의 천국인 진정한 나니아에서 소외되고요. 젊은 여자가 남자들의 맘에 들길 바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루이스는 그녀를 지옥에 떨어뜨린 것입니다!
풀먼의 이런 주장은 조금 과장되었습니다. 우선 진정한 나니아에 도달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빠졌다는 주장은 조금 약합니다. 진정한 나니아는 존재하는 모든 선량한 영혼들을 위한 장소는 아닙니다. 단지 아슬란을 믿고 숭배하는 자들을 위한 작은 클럽이지요. 그렇다면 수잔이 그 안에 들어가길 거부했다고 해서 지옥에 빠졌다고 믿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비판입니다. 좋은 교육을 받은 학자 출신의 작가가 파티 광들을 경멸했다고 해서 그걸 여성 혐오로 몰아붙이는 것 역시 단순하고요.
그러나 루이스에게 혐의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구식 남자였고 그의 여성관은 그가 살던 시대와 그의 종교에 구속되어 있었죠. 실제로 그는 보수주의자였고 신식 교육과 유행에 맹렬하게 반항했습니다.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든 진보적인 움직임에 대한 그의 강한 거부감은 나니아 시리즈에도 드러나 있어요. [은의자]에 등장하는 실험학교는 루이스의 관점에서 본 모든 신식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압축된 곳입니다. 그리고 그 형편없는 학교를 운영하는 건 분명 진보적인 쓰레기로 머리를 채운 것이 분명한 여자 교장이죠. 나중에 이 여자 교장은 국회에 진출하는데, 이 부분은 정치가들을 대상으로 한 무성적인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엔 아무래도 미심쩍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나니아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녀들입니다. 나니아의 세계에서 이들은 철저한 악역입니다. 하지만 현대독자들에게 이들은 설교꾼인 아슬란보다 훨씬 매력적인데, 그건 루이스가 이 악역들을 설정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들 때문이죠. 루이스는 이들을 악당으로 만들기 위해 전통적인 '여성적 미덕'을 모조리 지워버렸습니다. 나니아 시리즈의 마녀들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규칙과 의무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여성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강렬함이 루이스 자신도 어느 정도 매력적으로 보였음이 분명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건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면서 유태계 좌파 여성과 계약 결혼해 뜨거운 사랑을 나눈 그의 말년 경력과도 어느 정도 얽혀 있는 듯합니다. 그의 원칙과 인간적인 열정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여성들은 종종 그가 세운 원칙들을 일부러 배반하는 것처럼 보이죠. 이런 모순은 꽤 재미있는 문학적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갈등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변명이 조금 어렵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종교적 의미가 그렇죠. 루이스는 이 시리즈를 기독교적 알레고리로 썼고 그걸 애써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아슬란은 죽음 끝에 부활하는 예수입니다. 친구들과 아슬란을 배반하는 에드먼드는 유다입니다. 아슬란에게 헌신하고 종종 그를 목격하는 유일한 사람인 루시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법사의 조카]는 창세기이고 [마지막 전투]는 묵시록입니다. 더 있지만 이런 유사점을 나열하는 건 시간 낭비입니다. 그만큼이나 모든 것이 노골적이기 때문이죠.
이것이 나쁜가요? 아직까지는 나쁘거나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적 감흥은 충분히 훌륭한 아동 문학의 기초가 될 수 있으며 [나니아 연대기]가 기독교 우화를 담은 유일한 어린이 책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어린 독자들에게 소박한 기독교 믿음을 설파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20세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산 맹렬한 기독교 변증가였어요. 그는 [나니아 연대기]에서 단순히 자신의 믿음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와 거의 같은 강도로 적대 세력을 공격합니다. 예민한 성인 독자들이라면 나니아와 아슬란이 모두 꿈에 불과하다고 주인공들을 설득하는 마녀, 이교신인 타슈와 아슬란을 합쳐 하나라고 속이는 칼로르멘인들, 가짜 아슬란에게 속은 뒤 진짜 아슬란마저도 부정하는 난쟁이들한테서, 루이스가 생애 후반 동안 맹렬히 대항했던 사상적 조류를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심지어 마지막 편의 악당인 원숭이 시프트의 존재가 진화론자들의 캐리커처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루이스의 의도가 아니라고 해도 수많은 창조론자들은 그냥 그렇게 믿어버릴 걸요.
그렇다면 문제가 제시됩니다. 과연 그는 그가 성인들을 위해 쓴 종교 서적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나름대로 이치에 닿는 논증을 시도했는가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제 의견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물인 [나니아 연대기]는 변증서가 아니라 프로파겐다입니다. 풀먼은 정확한 단어를 뽑았어요. 이 책에서는 일방적인 설교만 있을 뿐 토론은 없습니다. 프로파겐다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 책들이 부정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어린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주의는 필수적이죠.
다음 질문. [나니아 연대기]는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가요? 답은 이번에도 '그렇다입니다. 까다롭게도 이들은 모두 그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얽혀 있습니다.
한 번 나니아 세계의 지도를 보세요. 이 평평한 세계에서 나니아는 북쪽에 있는 작은 나라이며 남쪽의 사막 밑에는 칼로르멘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습니다. 검은 피부색 때문에 'darkies'라고 불리고 타슈라는 흉측한 신을 섬기는 야만인인 그들은 척 봐도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무슬림들의 노골적인 캐리커처죠. 반대로 북쪽의 나니아는 '아름다운' 백인들이 사는 자유 국가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 책들은 벌써 현대 사회에서 허용된 '정치적 공정성'의 수위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루이스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우선 그는 칼로르멘 인들을 모두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았어요. 칼로르멘 귀족 소녀 아라비스는[말과 소년]의 두 주인공들 중 한 명이고 [마지막 전투]에서도 에메스라는 칼로르멘 청년이 아슬란이 이끄는 주인공들과 함께 진정한 나니아에 갑니다. 필립 풀먼의 비판에서 루이스를 변호하려 했던 [The Atlantic Monthly]의 비평가 Gregg Easterbrook은 이를 집어내 [나니아]의 천국엔 open-door policy가 있다고 주장했지요.
하지만 그 알리바이는 아직 약합니다. 대부분의 기성 종교들은 모두 open-door policy를 취하고 있죠. 회심하고 그 종교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종교들의 폐쇄성이 부정되는 건 아닙니다. 종교 재판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도 open-door policy는 존재했어요. 나니아의 천국이라고 특별히 이들보다 자비롭지는 않습니다. 나니아의 세계가 붕괴되고 진정한 나니아로 가는 문이 열렸을 때, 대부분의 칼로르멘 사람들은 무시됩니다. 자비로운 아슬란도 그들의 존재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고요. 이건 좀 이상하죠. 왜냐하면 (집필 순서대로 따지자면) 바로 전편인 [말과 소년]에서 아슬란은 아라비스의 계획 때문에 체벌이 가해진 칼로르멘 하녀에게까지 신경을 썼기 때문입니다. 아슬란은 왜 칼로르멘을 방치해두고 자신의 추종자들만 데려가는 걸까요?
그렇다면 진정한 나니아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들은 지옥에 떨어지나요? 아니면 그들의 세계 자체가 지옥인가요? 만약 진정한 나니아와 진정한 영국이 존재한다면 진정한 칼로르멘은 존재하니요? 그렇다면 그곳은 칼로르멘인들에게 진정한 천국이 될까요? 기독교 신앙과 플라톤 철학이 결합된 이 복잡한 세계의 우주는 쉽게 판단하기 힘듭니다. 하긴 당연한 것이, 나니아의 우주는 처음부터 계획되지 않고 시리즈와 함께 조금씩 성장해왔기 때문이죠. 심지어 나니아라는 세계 자체도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곳은 아슬란이 창조한 세계 전체일 수도 있지만 그 세계의 북부에 있는 작은 나라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루이스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이 반세기 전에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를 대신해 변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1950년대라는 시기는 '옛날이었다'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비판에서 해방될 수 있을 만큼 오래된 과거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 정도로 노골적인 편견을 담고 있는 옛 작품들은 대부분 잊혀졌어요. 살아남은 건 그 과거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혜안을 가졌거나 그런 단점들을 뛰어넘을만한 다른 장점들을 갖춘 작품들이죠. [나니아 연대기]는 그 첫 번째 조건에서는 대부분 탈락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조건은 앞으로도 충족될 수 있을까요? 과연 이 책들은 지금까지 언급한 혐의점들을 딛고 서서 다양성과 조화의 시대를 사는 우리 세대의 아이들에게 '건전한' 책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건 결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