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 대한 엄숙주의 경계하기
조금만 맘을 열고 조금만 더 확실하게 독자로서의 주권을 찾는다면 따분한 회색의 지식들은 순식간에 총천연색으로 변할 거고 도서관의 넓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며 책들은 새로운 얼굴을 드러냅니다.
전 백과사전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아무 책이나 뽑아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중간부터 읽기 시작하는 거죠. 그건 아일랜드 기근에 대한 정보일 수도 있고 아폴로 13호의 사고에 대한 것일 수도 있으며 고려청자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전 그냥 읽어요. 한 항목이 끝나면 몇 페이지 앞이나 뒤로 넘어가 무작위로 선택한 다른 항목을 읽고요. 재미있습니다. 가끔 그러다가 제 흥미를 끌만한 책이나 영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요. 제 취향의 상당히 큰 부분은 이런 식의 정보 룰렛에서 시작되었어요.
물론 이건 백과사전의 정식 사용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과사전을 꼭 하나의 방법으로만 써야한다는 법은 없죠. 백과사전이 낮잠용 베개로 쓰일 수 있다면 오락용 책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거야 독자 맘이죠. 책은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저자나 출판사는 책의 이용방식에 대해 독자에게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못해요. 유일하게 존재하는 압력은 책에 대한 독자 자신의 고정관념입니다.
독서에 대한 엄숙주의는 여기서도 심각한 부작용을 낳습니다. 독자들이 하나의 매체에 하나의 목적만 기대하게 세뇌하는 것이죠.
흠... 일단 철학서적을 예로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왜 이런 책들을 읽습니까? 교양을 쌓기 위해? 지식과 지혜를 얻기 위해?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책이 제시하는 개념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기 위해? 이유야 많겠죠. 사실 더 많습니다. 철학자라는 치들은 결코 일반적인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일반적인 한국 독자들은 철학자!라는 단어를 들을 때 논리학자나 언어분석철학자를 떠올리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역술가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겠죠. 하지만 논리학자들은 아직까지 독립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철학자들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딱한 철학과 학생들은 다른 학과 학생들이 이름도 요란한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을 논하는 동안 교실 구석에서 진리표나 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숨은 구석들은 한없이 많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독서의 차원은 더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조금만 더 자유를 얻는다면 차원은 훨씬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볼테르의 책들을 즐기기 위해 꼭 독자들이 계몽주의 철학을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깡디드』를 읽기 위해 배경을 알면 좋지만 그냥 읽어도 그 책은 재미있어요. 재미있는 패러독스와 익살이 가득한 즐거운 소설이지요. 이 책을 『해리 포터』처럼 읽는다고 뭐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미크로메가』는? SF입니다!
플라톤은 어떻습니까? 『에우튀프론』을 읽으면서 경건함과 가족간의 도리에 대해 플라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분석하고 토론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이 책 되게 웃기지 않습니까? 뱃속에 구렁이가 수십 마리는 들어있는 게 분명한 능글맞은 영감탱이가 온갖 소피스트의 무기들을 동원해 순진무구한 젊은이를 농락하는 걸 구경해보라고요. 배꼽이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가볍게 즐길만한 코미디입니다. 마찬가지로 『향연』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의 입장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남자들의 이야기도 그런 대로 재미있고 작품 전체에 흐르는 향락적이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따로 즐기는 것도 꽤 괜찮거든요.
시는 어떻습니까? 시의 목적은 독자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정화시키는 것입니까? 물론 많은 시인들이 그런 목적으로 시를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학서적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시의 목적이 그런 건 아니죠. 예를 들어 괴테의 『마왕』의 목적은 스티븐 킹의 『쿠조』의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독자들에게 서스펜스와 공포를 안겨주는 것이죠. 루이스 캐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삽입한 수많은 넌센스 시들은 어떻습니까? 그가 그것들을 쓰면서 과연 우리의 영혼을 건드리는 것에 관심이라도 있었을까요?
소설은 어떤가요? 전 도서관의 고전 문학 섹션에서 야한 부분만 골라서 집중적으로 따로 읽는 애를 한 명 알고 있는데 (이해하시길. 틴에이저랍니다) 그 애에겐 보카치오나 오노레 드 발자크, 윌리엄 셰익스피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심지어 성서의 작가들도 모두 포르노 전문 작가들입니다. 나름대로 유용하게 고전문학을 잘 이용해먹고 있는 거죠. 하긴 그런 이유가 없다면 그 애가 과연 『인간 희극』의 일부라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조금만 맘을 열고 조금만 더 확실하게 독자로서의 주권을 찾는다면 따분한 회색의 지식들은 순식간에 총천연색으로 변할 거고 도서관의 넓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며 책들은 새로운 얼굴을 드러냅니다. 결과적으로 독서는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고 유익한 행위가 될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마지막 문단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로 끝나는 글만 쓰게 하고 독서에서 진지한 영혼의 고양과 지식의 축적만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는 이런 자유는 박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선입견을 잔뜩 짊어진 어른이 되어 그걸 되찾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고요. 그러니 혹시 이 따분한 글을 읽고 있을 수도 있는 어린 독자들이여, 여러분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들이 뭐라고 하건 일단 자신의 자유를 시도라도 한 번 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