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힘든 이유
옛날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온 몸으로 부딪혀 가며 얻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살면서 쓰는 정보들은 상당수가 영화나 책에서 얻은 간접정보입니다. 그리고 우린 이런 정보들 속에서 별다른 권력이 없습니다.
전 며칠 전부터 로버트 에를리히의 『9가지 크레이지 아이디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니, 읽긴 다 읽었어요. 지금은 몇몇 내용들을 체크해가며 다시 읽는 중이죠.
『9가지 크레이지 아이디어』는 지금 학계에서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홉 가지 아이디어들을 검진하며 그 타당성을 평가한 책입니다. 그 아이디어는 이런 것들이죠. ‘에이즈의 원인은 HIV가 아니다’, ‘시간 여행은 가능하다’, ‘태양계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
걱정 마시길. 전 이 책을 리뷰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에겐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런 건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과 입장이 분명한 사람들의 몫이죠. 저도 이 책을 리뷰하거나 분석하기 위해 읽은 건 아닙니다. 그냥 자료 얻기 위해 읽었어요. 이 책이 다루는 몇몇 이슈들이 지금 제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몇몇 분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특히 ‘에이즈의 원인은 HIV가 아니다’와 ‘총기소유가 늘어나면 범죄가 줄어든다’ 말이죠.
에를리히는 이 두 아이디어 모두에 그렇게까지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는데, 그건 제가 기대했고 예상했던 결론이기도 합니다. 아마 그의 책과 거기에 실린 통계를 이용한다면 토론 때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남습니다. 과연 제가 에를리히의 통계 분석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또 뭡니까? 전 그의 비판을 따라갈 수는 있지만 그의 통계를 검증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자료들을 취사선택했는지도 모르고요. 에를리히는 자신의 책을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교과서로 활용되길 바라겠지만, 여기서 정말 그렇게 주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독자들은 생각 외로 많지 않을 겁니다.
이게 대중적인 교양과학도서들의 한계일 겁니다. 상호교류가 불가능한 거죠. 전문가들에겐 이런 책들이 필요 없습니다. 이 책들을 필요로 하는 일반 대중은 기껏해야 책이 제공하는 정보들을 꿀꺽꿀꺽 삼킬 뿐이고요. 더 곤란한 건 모순되는 정보들이 있을 경우, 대중은 그 정보들을 임의로 취사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골수 창조론자들이 대표적인 예겠죠. 아마 그 사람들 중 진화론에 대한 책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진화론을 극복할만한 무언가 대단한 가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맘에 들지 않아서죠. 아마 이 사람들은 진화론을 반박하는 뭔가 그럴싸한 문장을 발견하면 그냥 덥석 물 겁니다. 그게 인간이죠.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대중적인 교양과학도서들만의 한계가 아닙니다. 아니, 책들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영화나 연극의 한계이기도 하죠. 우린 세상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얻습니까? 옛날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온 몸으로 부딪혀 가며 얻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살면서 쓰는 정보들은 상당수가 영화나 책에서 얻은 간접정보입니다. 그리고 우린 이런 정보들 속에서 별다른 권력이 없습니다.
몇몇 정치적 영화들과 관객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한국 영화팬들은 마이클 무어의 영화들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일 것입니다. 물론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훌륭합니다. 날카로운 위트와 진정한 분노를 모두 갖춘 멋진 예술작품이죠. 하지만 우리가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그건 그의 작품이 사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가 우리 맘에 드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우리 맘에 드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간단히 정의해버리면 모든 게 쉽겠지만 과연 그게 그럴까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마이클 무어처럼 쇼맨쉽 과시와 정보 조작에 능한 인물의 입을 통해 나온다면 우린 그 정보들을 얼마나 받아들여야 할까요?
마이클 무어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의 방법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를 증오하는 반대파들도 많으니 그의 영화를 볼만큼 그가 다루는 주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인터넷을 잠시 검색해서 반대 의견들을 확인하고 자기만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겠죠. 적어도 우리가 주체적이 될 수 있는 기반은 다져진 셈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마이클 무어처럼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럴 거고요. 우린 그냥 우리가 원하는 정보들을 취사선택해 삼킬 것이고 그 제한된 정보들 속에서 우리 맘에 드는 작은 세계를 구축할 겁니다. 과학이나 통계처럼 어느 정도 전문적인 지식이 관련된 중요한 정치적 이슈에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우민으로 떨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