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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일본 전통극의 재창조 - 『쿠로즈카』
아마도 대학 시절에, 키쿠치 히데유키의 『요마록』이란 책을 보게 되었다. 일종의 일본식 판타지에, 폭력과 성이란 요소가 담뿍 담겨있는 『요마록』은 무협지와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아마도 대학 시절에, 키쿠치 히데유키의 『요마록』이란 책을 보게 되었다. 일종의 일본식 판타지에, 폭력과 성이란 요소가 담뿍 담겨있는 『요마록』은 무협지와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비슷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 책들 중 하나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제마령』이었다. 내용은 이거나 저거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요괴, 요마, 마수 등 기이한 생물이 등장하고 그것들을 물리치는 퇴마사, 음양사 같은 인물이 있다. 『제마령』에서는 란조라는 인물이 주인공이고, 『제마영웅전』에는 란조의 동생 산조가 등장한다. 이런 소설들의 특징은 별다른 내용이나 심각한 메시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꾸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읽는 순간이나 읽은 후의 통쾌함 때문에 다시 찾아 읽게 된다.
『마계도시 신주쿠』, 『뱀파이어 헌터 D』 등 계속해서 보게 된 키쿠치 히데유키의 작품은 대체로 비슷한 경향이었다. 하지만 유에마쿠라 바쿠의 작품들은 조금 달랐다. 그가 만화 『음양사』의 원작자 유메마쿠라 바쿠였던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어느 정도 순정만화 스타일의 그림체 때문이기도 했지만, 『음양사』는 어딘가 여성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또한 요괴와 퇴마사가 변함없이 등장하긴 하지만 『음양사』는 대단히 차분하고 깊은 울림이 있는 만화였다. 나중에 출간된 원작소설 『음양사』도 마찬가지다. 통쾌함보다는 인간과 요괴가 공존하는 세계의 풍경을 담백하게 그려낸 작품이 소설 『음양사』였다. 『음양사』는 유메마쿠라 바쿠의 관심이 일본 내부로 깊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작품이었다.
유메마쿠라 바쿠가 쓰고, 노구치 다카시가 그린 『쿠로즈카』를 보게 된 것도, 유메마쿠라 바쿠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그리고 요시츠네라는 인물 때문에.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역사 인물 가운데 하나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12세기 중반 숙적인 다이라 가문을 멸망시키고 형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하지만 공을 세우고도 오히려 형의 미움을 받아 억울한 죽음을 당한 비극적인 영웅. 당연히 민담이나 전설 등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최적의 인물이다. 『쿠로즈카』는 형에게 배신당한 요시츠네가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요시츠네와 부하인 벤케이는 깊은 산 속의 외딴 집에 묵게 된다. 외딴 집에는 신비한 매력을 지닌 쿠로미츠라는 여인이 홀로 살고 있다. 요시츠네와 쿠로미츠는 사랑을 하게 되지만, 쿠로미츠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결코 들여다보지 말라는 방을 들여다본 요시츠네는, 결국 쿠로미츠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사랑이 변하지는 않는다. 요시츠네는 여전히 쿠로미츠를 사랑하고,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그 사랑은 이어진다.
처음에는 『쿠로즈카』가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한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서두일 뿐이다. 요시츠네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온 형의 군대만이 아니라, 쿠로미츠가 지닌 불로불사의 비밀을 캐기 위해 당나라 시절부터 그녀를 쫓아다닌 조직과도 싸우게 된다. 결국 쿠로미츠와 요시츠네는 죽음 직전까지 몰리지만, 그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간다. 거의 천년이 흐른 후, 쿠로가 폐허 속에서 깨어난다. 120년 전 소행성이 떨어지고 그 여파로 일어난 핵전쟁 때문에 인류의 70%가 죽었다. 기존의 문명은 해체되었고, 개 얼굴이나 머리가 두 개인 인간 등 변종이 태어났다. 전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쿠로는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쿠로미츠의 피와 완전히 융합되지 못한 채 머리가 잘렸고, 그 여파로 다시 깨어날 때마다 기억을 잃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쿠로는 교토를 지배하는 적제의 부하로 일하게 된다. 쿠로미츠의 정체를 캐기 위해 쿠로는 하니와라는 조직의 사람들과 만난다. 그리고 관동으로 향한다. 관동을 지배하는 것은 백왕이고, 쿠로는 하니와의 중심인물인 사니와를 구출하기 위해 백왕의 성으로 잠입한다.
사실 『쿠로즈카』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쿠로즈카』는 요시츠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정확하게는 일본의 전통극인 노의 『쿠로즈카』를 유메마쿠라 바쿠식 판타지로 바꿔놓은 작품이다. ‘노의 『쿠로즈카』를 현대풍 연극으로 만들고 싶은데 대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유메마쿠라 바쿠는 창작을 시작했다. 거장 데츠카 오사무 역시 『쿠로즈카』를 재창조한 『아다치가하라』를 그린 적이 있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아다치가하라』가 ‘ 『쿠로즈카』를 소재로 한 것 중 최고의 걸작이며, 고전과 미래세계를 훌륭하게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자신의 『쿠로즈카』 역시 『아다치가하라』를 염두에 두고 재창조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희곡으로 생각했기에 『쿠로즈카』의 시공간은 무척 자유롭다. 희곡에서는 ‘미래, 현재, 과거가 무대 위에서 동시에 진행될 수도 있다. 소설은 그럴 수가 없다. 소설은 언제나 눈으로 독자가 확인하고 있는 활자가 전부이다. 가령 한 행마다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적으며 스토리를 진행하더라도, 매순간 독자가 읽고 있는 세계는 그것이 과거이든 현재이든 혹은 미래이든 시제가 항상 하나로 통일된다. 대화를 보더라도 소설에서는 두 사람의 대사를 동시에 표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소설 『쿠로즈카』를 각색한 만화 『쿠로즈카』다. 유메마쿠라 바쿠는 『쿠로즈카』를 희곡으로 쓰다가 잘 풀리지 않아 소설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편으로 생각했지만 점점 길어지기 시작해서 무려 4년간 연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만화는 장편 소설을 각색한 만화 『쿠로즈카』인 셈이다. 희곡의 자유로움보다는 소설의 드라마틱한 세계가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쿠로의 과거가 요시츠네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다만 쿠로미츠와의 관계, 그들이 맺은 관계와 불사의 육신이라는 주제가 중요할 뿐이다. '모든 것이 새롭게 정립된 가공의 세계에서 쿠로는 어떠한 모험을 할 것인가'가 『쿠로즈카』를 보는 이유이다. 그 태생이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결국은 이야기의 힘 때문에. 유메마쿠라 바쿠와 키쿠치 히데유키는 이야기의 힘이란 점에서 대단히 탁월한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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