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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진짜 의미 - 『꼴찌, 동경대 가다!』
미타 노리후사의 『꼴찌, 동경대 가다!』는 정보만화로 분류해야 할까? 『꼴찌, 동경대 가다!』는 도산 위기의 고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열등생들을 동경대에 진학시키는 ‘특별 수업’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미타 노리후사의 『꼴찌, 동경대 가다!』는 정보만화로 분류해야 할까? 『꼴찌, 동경대 가다!』는 도산 위기의 고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열등생들을 동경대에 진학시키는 ‘특별 수업’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뭔가 사건들이 일어난다기보다는, 열등생들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한 방법이나 동경대 진학의 구체적인 노하우 같은 것들이 잔뜩 실려 있다. 만화를 보면서 그 ‘특별 수업’이 꽤 그럴 듯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꼴찌, 동경대 가다!』를 각색한 TV 드라마 <드래곤 사쿠라>(원제와 동일하다)가 일본에서 방영된 후 실제로 동경대 수험생이 12% 증가했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꼴찌, 동경대 가다!』에 나오는 공부의 요령이 정말 효력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만화와 드라마가 동경대에 원서를 접수할 용기를 주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꼴찌, 동경대 가다!』를 단순한 정보만화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공부하는 방법을 위주로 알려주기는 하지만, 이면에는 분명한 작가의 철학이 있다. 변호사인 사쿠라기 겐지는 한때 폭주족이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별다른 배경이나 끈이 없어 근근이 사건 수임을 받아 생활하는 초라한 신세다. 역전의 기회를 노리던 사쿠라기는 자신이 맡은 류우잔 고등학교가 일본 최초의 학교 도산 사례라는 것을 알고 머리를 굴린다. ‘그냥 도산시키기보다는 민자재생법에 근거하여 사업을 계속한다. 스포츠 강화로 학교의 지명도를 올려 많은 학생을 모집한다는 종래의 계획을 버리고, 철저한 입시지도와 진학실적으로 학생을 유인하는 명문 고등학교로 탈바꿈하겠다.’ 사쿠라기의 계획은 딱히 교육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다. 단지 ‘사업’의 성공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떵떵거릴 수 있는 개인 사무실을 차리겠다는 개인적인 야심 때문이다. 즉, 사쿠라기는 어떤 이상이나 가치를 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 너희에게 투자를 하겠다. 그것은 너희에게도 이익이 될 테니, 너희도 나를 도와다오’라는 식의 철저한 자본주의적 상호교환이다.
5년 후 100명의 동경대 입학자를 배출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사쿠라기는 일단 2명의 학생을 동경대 진학반에 편성한다. 아니, 하고 싶다는 학생 둘을 겨우 끌어들인다. 술집을 하는 어머니 때문에 밖으로만 나돌고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던 미즈노와 다른 가족은 다 동경대 출신이지만 언젠가부터 자신만 엇나가버린 불량학생 야지마. 중학생 정도의 기초 학력도 없는 미즈노와 야지마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꼴찌, 동경대 가다!』의 즐거움이다. 사쿠라기는 독단적으로 미즈노와 야지마의 지망을 동경대 이과 1부로 정한다. ‘넓게 얕게 확실히’ 공부하면 이과 1부는 가능하지만, ‘문과는 꾸준한 암기와 논리적 사고의 축적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리라는 것이다. 특별 수업을 위해 사쿠라기는 특별한 선생들을 데리고 온다. ‘주입식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다’라는 신념을 지닌 수학의 귀재 야나기 선생, 감동적인 글이 아니라 읽으면 두근거리는 글을 읽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국어의 아쿠타야마 선생 등이 알려주는 교육법은 경청할 만하다.
사실 동경대에 가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꼴찌에 가까운 학생들을 1년 만에 일류 대학에 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확률, 논리적인 가능성이 있다면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것이 픽션이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교육관과 세계관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사쿠라기는 ‘개성과 인성을 살려주는 학교로 가자’라는 모호한 슬로건에 반대한다. 그런 슬로건은 “미지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아무 근거도 없는 무책임한 망상을 심어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 데 놀아나서 개성을 살리면서 남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사회란 그런 시스템이 아니니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야지마에게 말한다. “사회는 룰이 있고,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건 똑똑한 놈들이 제 멋대로 만들고 있다. 똑똑한 놈들은 속지 않고, 이익을 보며 승리한다. 바보는 속으면서 손해 보고 진다. 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스로 룰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라고.
폭주족은 사회의 룰을 거부한 이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때일 뿐이다. 사쿠라기는 한때 룰을 거부했지만, 지금은 룰을 지키며 그 안에서 살고 있다. 룰 안에서 성공하려 한다. 그가 룰을 바꾸고 싶다면 룰을 뛰어넘을 만큼 성공해야만 한다. 결국 ‘창조는 틀 안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쿠라기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도 아직 창조를 하진 못했지만 하나의 성공이 더 큰 성공을 불러온다면 창조에 도전할 수도 있다. 물론 동경대에 가는 것이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의미해도 좋다. 그것은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고, 일종의 편도 티켓을 쥐여주는 것이다. 동경대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경대라는 공간, 조건이 무형적인 이익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아무런 목적이 없었던 미즈노와 야지마에게는 분명한 이득이다.
‘일벌 이론’이란 것이 있다. 일벌 100마리를 관찰하면, 실제로 열심히 일하는 건 25마리뿐이라고 한다. 50마리는 적당히 일하고, 나머지 25마리는 ‘농땡이’를 친다. 그런데 그 25마리의 나태한 일벌로만 100마리를 모아 한 공간에 넣으면, 그 중의 25마리는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수한 일벌들로만 100마리를 모아도, 25마리는 나태해진다. 처음부터 나태하거나 열심인 것이 아니라, 목적과 경쟁이 일벌을, 그리고 인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논리지만 현실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의 세상에 들어가서 살아가려면, 그 틀을 깨고 창조를 하려면, 일단은 경쟁의 승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미즈노와 야지마는 아주 단순한 공부의 ‘방법’을 배우지만, 결국은 알게 된다. ‘무엇을 보더라도 무엇을 듣더라도 자극과 발견이 있을 수밖에. 그렇구나, 이게 공부라는 거구나’라는 사실을. 그게 작가가 말하는 공부의 진짜 의미다.
<미타 노리후사> 글,그림3,150원(1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