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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거나 혹은 죽거나 - 『R.O.D.』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히스토리언』은 기대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선전 문구라던가, 간단한 줄거리를 들었을 때는, 드라큘라의 새로운 재해석과 함께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의 액션이 가미된 모험담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히스토리언』은 기대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선전 문구라던가, 간단한 줄거리를 들었을 때는, 드라큘라의 새로운 재해석과 함께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의 액션이 가미된 모험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스토리언』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역사와 고서의 매력에 푹 빠진 학자일 뿐이고, 드라큘라의 정체를 쫓는 모험담은 공들인 인문지리지를 읽는 듯 고즈넉하다. 서스펜스 대신, 그들이 방문하는 도시의 풍경을 매력적으로 그려내는데 더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히스토리언』은 특이한 즐거움이 있었다. 모든 것이 책에서 비롯된다는 것. 역사학자들은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 때문에 목숨을 건 모험을 시작한다. 드라큘라는 자신의 은거지에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책을 소장한 서재를 가지고 있고, 그 서고의 관리를 위해 최고의 역사학자들을 납치한다. 모든 도시에는 도서관이 있고, 그 곳의 사서들은 대부분 죽거나 흡혈귀가 된다. 저자는 “(사서)들의 슬픈 운명이 학문의 근원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히스토리언』은 드라큘라 이상으로 책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책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인간이 문자란 것을 만든 이후, 인류의 모든 것은 책에 기록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모든 책이 지금까지 존재하지는 않는다. 자연적으로 사라진 것만이 아니라, 민족이나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수많은 책이 사라졌다. 그 책들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인류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모두 안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나라의 전설에 등장하는 “영생을 얻은 존재들은 모두 극도로 타락했거나 적어도 사악한 방식으로 불후의 존재가 되었”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해서, 결코 현명해지거나 성인이 되지는 않는다. 『히스토리언』은 오히려 절대적인 진리가 쉽게 타락하고 잔혹해진다고 말한다.
쿠라타 히데유키가 쓰고, 야마다 슈타로가 그린 『R.O.D.』 역시 절대적인 진리가 담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매장도서관에는 중국의 긴 역사를 통해, 인류의 모든 것이 기록된 책들이 존재한다. 그 도서관을 찾는 사람은 인류를 지배할 수 있다고 『R.O.D.』는 말한다. 그게 정말일까, 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R.O.D.』의 세계는, 종이와 책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가상의 세계다. 이곳에서 가장 힘이 센 비밀조직은 대영도서관이고, 최고의 에이전트는 종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종이술사다. 주인공인 요미코 리드맨은 사상 최강의 독서광이자, 19대 페이퍼 마스터다. ‘종이와 사람을 맺어주는’ 종이술사인 요미코는, 종이만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 막을 수 있다.
“우리들의 능력은 집착 끝에 얻게 되는 것. 이 세상에 단 하나를 사랑하고, 찾고, 광적으로 탐내고, 다른 모든 것과 맞바꾸어 몸에 걸치는 잘못된 기적”이라는 말처럼, 종이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책을 사랑하고, 책을 믿어야 한다. 종이는 결코 우리들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어야만 한다. 소설과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각각 발표된 『R.O.D.』는 모두 요미코 리드맨이 주인공이지만, 조금씩 설정이 다르고 각각 다른 구성을 가진 에피소드로 펼쳐진다. 만화판 『R.O.D.』에서는 요미코가 어떻게 종이술사가 되었는지, 과거를 보여준다. 사랑했던 연인이자 18대 페이퍼 마스터 도니 나카지마와 어떻게 이별하게 되었고, 도니의 어둠인 리들리 원과 어떤 악연을 쌓았는지 파고 들어간다.
처음 애니메이션으로 보았던 『R.O.D.』가 눈길을 끈 것은 설정의 특이함 때문이었다. 종이만 있으면 강철도 자를 수 있고, 심지어 종이가 비행기로 변신할 수도 있는 종이술사의 능력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화려하게 묘사된다. 종이 접기라든가 팝업북이 보여주는 것처럼, 종이의 가능성은 현실에서도 무한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종이의 묘기를 환상적으로 그려낸 『R.O.D.』를 보면서 종이의 마력에 빨려들었다. 게다가 ‘책’에 대한 매혹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공감했다. 모든 돈을 책 사는 데 퍼붓고, 책만 있으면 행복한 요미코의 상태를 『R.O.D.』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Read or Die’라는 제목에 정말 공감했다.
만화판 『R.O.D.』에는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이 나온다. 요미코 리드맨은 각각 일본어와 영어로 ‘읽는 사람’이란 뜻이고, ‘독사’를 毒蛇가 아니라 讀蛇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말장난들. 대영도서관의 라이벌 조직은 독선사(讀仙社)이고, 페이퍼 마스터의 숙적은 모든 것을 태우는 능력자인 파이어 잉크다. 『R.O.D.』에서 고문하는 방법은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전체를 읽으면 발광하기 때문에 제작자 5명이 교대로 만든 『암연』이란 책이 그것이다. 또한 대영도서관의 수장인 젠틀맨은 선과 악을 모두 관장하는, 어찌 보면 악마 그 자체인 인물이다. 이 세계의 지배를 위하여 모든 것을 픽션으로 만들어내고, 속여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 바로 젠틀맨이다. 『R.O.D.』는 종이와 책을 둘러싼 기발한 상상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그걸 즐기는 것만으로도, 『R.O.D.』를 읽는 것은 즐겁다.
책을 좋아한다면, 너무나 마음에 드는 경구들도 한가득 담겨있다. “독서광이라는 건 정신의 연금술사”라든가, “사람을 믿어. 그리고 종이를 믿어. 사람과 종이 사이에서 태어난 책을 믿는 거야”라든가, “책은 현실에서 달아나기 위한 게 아니야. 그럼 인간은 책의 노예가 되고 말지. 훌륭한 책과 대등해지기 위해, 우린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는 거다” 같은 말들. 『R.O.D.』는 판타지의 상상력으로,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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