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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여운을 남기는 만화 - 『충사』
생명이란 무엇일까?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바이러스도 생명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돌은 생물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도 생명은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바이러스도 생명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돌은 생물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도 생명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통념이다. 현대의 과학이 알려준 생명의 정의에 근거한. 여전히 영혼이 존재하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만, 영혼 자체가 생명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명이란 무엇일까? 혹시 이런 것들도 생명일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면 그것이 바로 생명이 되는 남자가 있다. 그것은 벌레다. 생명 그 자체에 아주 가까운 벌레로, 형태나 존재가 애매한 것이다. 유령 중에도 정체는 벌레인 것이 있다.(녹색의 좌) 숲 속에서 생식하는 벌레 운은 소리를 집어삼킨다. 달팽이관 안에서 기생하면서 들어오는 소리를 전부 먹어버린다. 아는 운과 함께 행동하면서 운이 만든 무음을 먹는 벌레다. 가리지 않고 음을 모으기 때문에 아가 기생하는 사람은 가까운 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고, 그 외의 모든 소리가 밀려들어온다.(부드러운 뿔) 몽야간은 꿈속에 사는 벌레다. 몽야간 때문에, 자신의 꿈대로 현실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몽야간은 미래를 꿈으로 보여주는 벌레가 아니라 그가 본 꿈을 현세로 끌어내 전염시키는 벌레다. 꿈을 현실로 이어주는 벌레들의 통로가 있어 사람이 깨어있는 사이에 벌레들은 거기서 잠든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베개다. 베개의 어원이 영혼의 창고, 라는 설도 있듯이, 베게는 몽야간의 둥지로도 쓰인다.(침소로)
우루시바라 유키의 『충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묘한 생명에 관한 만화다. 일종의 판타지이지만, 『충사』가 말해주는 ‘벌레’의 이야기는 대단히 매혹적이다. ‘아주 먼 옛날 낯익은 동식물과는 전혀 틀린 기괴하고 하등한 무리들. 사람들은 그런 이형의 무리들을 두려워했고, 언제부턴가 그것들을 가리켜 벌레라고 불렀다.....벌레는 생과 사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 생물인 듯 하면서도 무생물 같은 죽어가면서 살아있는 존재.’ 충사는 그런 벌레들과 싸우거나, 그들을 해방시켜주는 이들을 말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충사들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우루시바라 유키는 아주 천천히 벌레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준 후에야 충사란 존재가 무엇인지, 주인공인 깅코의 과거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준다.
‘붓의 바다’ 에피소드에서는 충사의 역사가 나온다. 탄유 아가씨는 카리부키가 4대째의 기록자다. 탄유의 조상은, 모든 것을 없애는 벌레를 퇴치한 후 몸이 검은 색이 되어 죽었다. 그것이 후손의 체내에 전해지며, 몇 대에 한 번씩 몸 일부에 검은색 멍을 가진 이가 태어난다. 그 아이는 기록자로 선택되어, 평생 기록을 하는 일에 헌신해야만 한다. 벌레 퇴치를 한 이야기들을 종이에 적어나가면, 그 때마다 검은 멍이 있는 발에 고통이 느껴진다. ‘충사들의 살생에 관한 이야기. 발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미소하고 하등한 생명으로의 교만. 이형의 것들에게 이유 없는 공포가 부르는 살생. 그런 것들이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벌레에게 몸이 조금씩 침식되어 간다. 그런 벌레를 사랑하면서 퇴치한다.’ 탄유는, 벌레를 받아들인다. 단지 벌레를 학살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너무나 괴롭다. 그녀가 깅코를 기다리는 이유는, 깅코가 벌레를 인간과 동격인 ‘생명’으로 포용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충사는 벌레를 퇴치하는 자가 아니라, 벌레와 함께 살아가는 자다.
『충사』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벌레라는 가상의 생물, 혹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생명을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눈속의 빛’에 단서가 나온다. 소녀는 눈꺼풀 뒤에 또 하나의 눈꺼풀이 있다고 말한다. ‘눈을 감으면 뭔가 번쩍거리는 게 눈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정말 암흑을 보고 싶을 때, 그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있는 눈을 다시 한 번 감는 것. 그러면 위쪽에서 진짜 어둠이 내려와. 그리고 빛의 강이 보인다.’ 소녀는 그 빛을 보다가, 시력을 잃었다. 깅코는 그것 역시 벌레라고 말한다. 눈 속의 어둠 벌레. 소녀의 벌레를 없애주지만, 단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빛을 손에 넣었을 때 두 번째 눈을 감는 법을 잊었다. 두 번째 눈, 진짜 어둠, 이질의 빛.....우리들 발밑을 헤엄치는 무수한 생명체 무리들’이다. 인간이, 언젠가부터 잊어버린 그 무엇. 깅코는 그 생명들과 싸우면서, 포용한다. 그것은 모든 생명에게 공통된 것이다. ‘싫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강하기 때문에 죽여야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약육강식이다.
그렇다면 깅코는 어떻게, 다른 충사들과는 달리 학살 자체에 빠져들지 않는 것일까. 깅코에게는 눈이 하나뿐이다. 어린 시절의 깅코는, 이리저리 떠돌다가 한 여인을 만난다. 항상 있는 어둠에 사로잡힌 가족과 친구들을 구하려는 여인을. 그녀 역시 충사였고, 그녀가 깅코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다.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그녀는 깅코에게 말한다. ‘공포나 분노로 눈을 멀게 하지 마. 이 세상 모든 생물에는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깅코는 그 가르침을 얻고, 항상 있는 어둠에게 벗어나기 위해 한쪽 눈을 은빛 벌레에게 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진정한 충사로서.
『충사』가 말하는 벌레는, 결국 우리들과 동일한, 그러나 다른 형태의 생명인 것이다. 그런 벌레들을 보기는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이 세상에 그런 ‘생명’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달라질 것 같다. 『충사』는 정말, 기묘한 여운을 남기는 만화다.
<우루시바라 유키> 글,그림4,500원(10% + 5%)
인간과 벌레의 삶을 잇는 벌레선생의 여로 무릇 불길하고 꺼림직한것. 하등하고 기괴하여 흔한 동식물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여겨지는 것. 예로부터 사람들은 그 이형의 무리에 대해 두려움을 품어왔고 언제부턴가 이들을 한데 묶어 '벌레'라 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