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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이고 풍성한 캐릭터의 전형 - 『해황기』

판타지는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건 무(無)나 게으름에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를 경탄하게 만드는 상상력의 수원지에는, 무수한 노력과 도전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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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건 무(無)나 게으름에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를 경탄하게 만드는 상상력의 수원지에는, 무수한 노력과 도전이 잠들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미술관에 갔을 때 느낀 것 하나는, 그가 정말 지독한 노력가라는 점이었다. <이웃의 토토로>의 숲을 그리기 위해 찍어놓은 수많은 숲과 자연을 담은 사진들 그리고 사진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독특한 비행선을 만들어내기 위해 참조한 19세기의 상상화들. 『마녀배달부 키키』를 위해 모은 마녀의 상상도와 과거의 사진들. 그 치열한 노력 끝에, 우리가 경탄하는 상상이 탄생한 것이다. 상상은 현실에 기반한 것이고,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들었는가, 그리고 생각하는가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결정된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이 알고 있던, 여기저기서 모은 북구와 켈트의 신화 그리고 언어학의 지식 등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아무나 『반지의 제왕』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와하라 마사토시가 그린 『해황기』의 세계 역시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바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과거 인류의 역사, 그리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통찰 없이 『해황기』란 작품은 나올 수 없다. 과거처럼도 보이지만, 해황기의 무대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처럼 고도의 물질문명이 사라진 후 먼 미래의 이야기다. 몽고를 연상시키는 동쪽의 나라 월한의 왕 카자르 세이 론은, 바다의 일족인 판 감마 비젠에게 도움을 받는다. 월한의 이웃 나라 쿠아라에게 화평을 청하기 위해 나섰다는 카자르 세이 론은, 내부의 적에게 쫓기고 있다. 판은 대륙 최고의 병법자라는 투반 사노오와 함께 론을 도와주지만 론의 야심은 단순한 화평이 아니었다. 옛날 대륙의 반을 제패했다는 전설의 패왕 홍무제의 부활이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론은, 주변의 적을 물리친 후 이웃 나라들을 점령해가며 서쪽의 대국 로날디아로 향한다. 한편 격동하는 대륙의 상황을 지켜보던 판은 해도로 돌아가 새로운 해왕을 뽑는 경기에 참여한다. 『해황기』는 바다를 무대로 펼쳐지는, 『삼국지』『대망』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판타지다.

『해황기』가 다른 판타지와 다른 점 하나는, 바다를 주 무대로 펼쳐진다는 점이다. 『해황기』의 주인공은 론이나 투반이 아니라 판 감마 비젠이다. 누구도 그 위치를 알지 못하는 해도에서 살아가는 바다의 일족. 그들은 중요한 해역마다 함대를 파견하고, 해왕 직속으로 그림자선 7대를 가지고 있다. 대륙의 어떤 대군도 바다에서는, 바다의 일족에게 대항할 수 없다. 판 감마 비젠은 바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고, 최고의 항해 실력을 지닌 뱃사람이다. 당연히 『해황기』에는 바다에 얽힌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바다를 모르고는 그 에피소드를 만들 수도, 그릴 수도 없다. <수라의 문>의 작가 카와하라 마사토시는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여렸을 때부터 뱃사람을 동경했고 선장이 되기 위한 해양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바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범선과 갤리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살과 바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해왕을 뽑기 위한 시합 장면은, 바다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릴 수 없는 장면이다. 정확하게 그 배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몰라도, 그 긴박함과 절묘한 타이밍 같은 것을 리얼하게 느낄 수 있다. 판타지인 『해황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란 존재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해황기』의 진정한 재미는 단지 바다가 아니다. 바다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진행시킬 수 있는 무대일뿐이다. 거대한 대륙과 바다를 둘러싼 패권싸움이 『해황기』를 읽는 즐거움이다. 고대의 ‘과학’을 손에 넣은 로날디아와 홍무황의 부활이라는 카자르 세이 론의 싸움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바다의 일족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궁극적으로 이 세계는 누구를 진정한 패왕으로 섬길 것인가. 『해황기』는 <삼국지>나 <초한지> 그리고 어떤 판타지나 대하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판 감마 비젠의 적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영웅들도 흥미롭다. 홍무왕의 부활이라는 카자르 세이 론, 소국 가르하산의 군사가 된 알 레오니스 우르굴라, 로날디아 해군의 최연소 함장인 올브르와 데 포레스트, 판과 겨루어 새로운 해왕이 된 솔 카프라 세이리오스 등등 판의 적이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해황기』에는 널려 있다.

그 중에서도 『해황기』의 진정한 재미는 바로 판 감마 비젠이다. 그림자선 8번의 함장인 판 감마 비젠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 누구도,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직속 부하인 니카 탄브라는 판이 게으르고, 성질 나쁘고,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맞다. 그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하고, 되도록 분쟁이나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구경만 한다. 거대한 일본도를 등에 차고, 판은 반드시 필요할 때에만 싸움에 참여한다. 판은 결코 열혈의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게으르게 기다린다. 모든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고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의 인물들이 판에게 반하는 것은, 결국 그릇의 크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버릴 수가 있다. 채우기 위해 버리고, 버리기 위해 채운다. 판 감마 비젠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 『해황기』는 스릴이 넘친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한 주인공은 어딘가 반감을 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 판 감마 비젠은 너무나 그릇이 크다. 직접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캐릭터와 이야기로 통한다. 캐릭터가 풍부하고 생생하면, 주어진 설정 안에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간다. 굳이 극적인 상황을 만들지 않아도, 스스로 만들어간다. 『해황기』를 보면, 매력적이고 풍성한 캐릭터의 전형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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