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봉석의 만화이야기
인간에게 우주란 무엇일까. 아주 오래 전, 원시시절부터 인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잠시의 안식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맹수들에게 몸을 지키기 위하여 늘 주변을 둘러보다가, 잠시 올려다본 하늘에는 구름이 있고, 그 너머에는 짙은 어둠, 그리고 환하게 빛나는 별이 있었다. 그 곳에 가면,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가고, 그 어딘가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떨어지는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듯이.
인간에게 우주는, 영원한 이상향이었다. 하늘의 모습을 땅에 그리고, 별의 움직임을 따라 달력을 만들었을 때부터, 인간은 우주를 향한 도전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대기층을 똑바로 뚫고 나가, 오직 우주의 꼭대기만을 향한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 이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운가. 의지로 가득 찬, 늠름한 기계. 인간이 옛부터 통과해온 시대’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주로 향한 인간의 꿈은, 땅에 발을 디디고 선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도전이었다. 우리에게는 날개가 없기에.
유키무라 마코토의 『프라네테스』는 우주에의 도전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의 이야기다. 2070년대, 인간은 달과 화성에 주거지를 만들고, 목성에 발걸음을 내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하츠마키와 유리, 휘는 우주의 쓰레기인 데브리스를 회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데브리스를 회수하는 일은 지겹고도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유가 있다. 유리는 아내의 유해 혹은 유품을 찾기 위해 우주를 떠돈다. 하치마키는 자신의 우주선을 살 돈을 모으겠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계획이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우주로 나온 이유와 열정이 있다. 『프라네테스』는 그들의 삶과 열정을 통해 우주시대의 인간조건을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우주는 결코 꿈이 아니다. 20세기의 츠올코프스키는 ‘지구는 인류에게 요람과 같은 존재다. 하나 요람에서 평생을 보내는 자는 없다. 우리들은 이 요람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짊어져야 할 사명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치마키의 아버지인 고로는 ‘난 이 우주에 오고 싶어서 왔고, 이젠 질렸으니 돌아가는 것뿐이다. 이기적인 게 싫은 녀석은 우주를 개척할 수 없어’라고 반문한다. 그들이 우주로 온 이유는,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창한 이유를 붙인다고 해도, 근본적인 것은 그들의 순수한 욕망이다.
하치마키는 목성으로 가는 폰 브라운호의 승무원이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런 그에게, 후배인 타나베가 질타한다. ‘사랑이 없는 선택은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하치마키는 고집스럽게, ‘홀로 살다가 홀로 죽는다. 그게 완성된 우주선원’이라고 대답한다. 그 냉정한 현실인식은, 우주의 법칙이다. 우주의 가혹함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결혼을 해도, 우주 선원은 많아야 1년에 한번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이다. 폰 브라운호에 탄다면, 7년간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번다고 말해도, 결국 그것은 이기적인 욕망을 위장한 것일 뿐이다. 남편도, 자식도 우주선원인 하치마키의 어머니는 말한다. ‘좋은 우주선원의 조건은, 반드시 살아 돌아오는 것’이라고.
우주 시대라고 해서 지금과 별다를 것은 없다. 그저 상황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21세기 말에도 테러조직은 있다. 우주방위전선의 지도자는 아랍 출신이다. 석유가 사라진 중동 지역은 아프리카보다도 심한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은 이제 석유 대신 달과 화성의 광물질을 사용하고 있다. 우주 개발의 목적은 결국, 자원의 확보를 위한 것이다. 그것조차 모두 소비한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더 먼 우주로 가서 자원을 확보하고, 그것을 다 쓰고 나면 더 먼 우주로. 그것은 어리석은 인간이 세기를 거듭하며 되풀이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누군가 끊어야 할 것 아닌가, 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꿈이란, 결국 자본의 욕망과 뒤얽히게 된다. 아무리 추잡한 이윤의 법칙이 우주개발에 존재한다 해도, 우주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미래의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프라네테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사랑을 말하는 타나베나 하치마키가 아니라 비정한 사업가 웨르너 록스미스다. 엔진 개발을 하던 중 대형사고로 수 십 명을 죽게 한 록스미스는 냉정하게,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었다’고 말한다. 누구는 그를 살인마라고 부르지만, 그 사고로 죽었던 록스미스의 부하 엔지니어는 동생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록스미스는 현대의 구스코 부도리야.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 주인공. 부도리는 어렸을 때 힘든 농사일과 삶의 고달픔을 몸소 배웠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농사를 그만둔 후에도 그는 그 일을 잊지 않았어. 연구원이 되어 사람의 행복을 위해 싸운 거야. 화산의 가스를 이용해서 구름을 만들고, 날씨를 조종하고, 일조와 냉해에서 사람들을 구했지.’ ‘나도 구스코 부도리처럼 내가 만든 엔진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라고 말했던 엔지니어는 결국 부도리처럼 죽었다. ‘부도리는 결국엔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는 임무를 스스로 맡았습니다. 냉해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화산의 힘으로 날씨를 조종하기 위해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카르보나도 산에 올라 분화를 시켰죠.’
록스미스는 말한다. ‘당신이 사랑한 사람은 구스코 부도리였소. 당신의 그 사랑은,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없었을 거요’라고. 그는 냉정하고, 그는 합리적이고, 그는 잔인하다. 슬픔을 알지만, 그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알고 있다. ‘신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간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진정한 사랑을 모르고 살테니까’라고 믿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얻지 못한 채, 그래도 인간은 그 갈망 때문에 우주를 방황할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방황을 선택했기에.
우주로 향한 인간의 열망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다. 언제나 그런 방황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작가도 그것을 알고 있다. 『프라네테스』는 다소 뻔한 답을 들려준다. 우주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고, 우리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우주는 내 마음 안에도 있고 등등 밤고양이의 말처럼 ‘상당히 흔해빠진 대답’만을 내려준다. 하지만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언제나 해답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방황을 거듭한다. 몰라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느끼거나, 욕망에서 한걸음 물러서야만 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만은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하치마키의 깨달음도 그런 것이다. 가장 사소한 것, 가장 일상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우리 자체가 우주인 것이다.
<유키무라 마코토> 글,그림3,150원(10%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