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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80년대 이야기『도쿄 80's』
대기업 광고회사에 다니는 마카베 준페이는, 적당히 사회생활에 물들은 속물이다. ‘크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을 대기업으로 옮기고, 스폰서 회사의 부장의 딸과 약간은 정략적으로 결혼하고, 같은 회사의 여직원과 안전하게 바람을 피고……
대기업 광고회사에 다니는 마카베 준페이는, 적당히 사회생활에 물들은 속물이다. ‘크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을 대기업으로 옮기고, 스폰서 회사의 부장의 딸과 약간은 정략적으로 결혼하고, 같은 회사의 여직원과 안전하게 바람을 피고, 더 이상 계절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마음의 흔들림이 존재하지 않는 중년의 회사원. ‘맘이 안 통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내 생각을 억누르고 억지웃음을 짓고, 꽉 막힌 상사와 무능한 부하에게 치를 떨면서도, 어쩌면 나도 상사와 부하로부터 무능한 부하, 꽉 막힌 상사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가끔 든다.“
중년 아저씨가 되어버린 마카베는 어느 날, 대학 동창인 아이의 전화 한 통을 받고, 청춘의 시절을 떠올린다. 마카베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기 전에 섹스를 해 버린 여자. 그에게 추억을 일깨운 것은 아이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친구의 부음을 전해준다. 그 빛나던 시절을 함께 했던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그리고 떠올린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 세월을 거치면서 자신은 변했고, 어느 새 그 시절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친구는 여전히 서핑을 타다가, 사고로 죽었다. 대학 시절, 바다에 갔을 때 친구는 말했다. “나 이런 여름이 평생 계속되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해.” 그 말을 하며, 친구는 울고 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준페이는 ‘이봐 어떤 인생이었어 너는...가르쳐 줘....줄곧 변하지 않은 거냐....너는’이라고 중얼거린다.
안도 유마 원작, 오시이 토모야가 그린 『도쿄 80's』는 과거를 회상하는 준페이의 추억을 따라간다. 20년 전, 1982년의 대학 교정으로. 『도쿄 80's』의 장르는 멜러물에 속하지만, 제목이 말해주듯 방점은 80년대의 도쿄에 찍혀있다. 80년대의 풍경을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그 시절의 연애상을 알려준다. ‘휴대전화와 메일이 없던 시대’의 사랑 풍속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도쿄 80's』는 ‘그 좋았던 시절’의 회고담을 늘어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42살의 안도 유마는 ‘나는 회고주의적인 인간이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에는 그 시절이 맹렬하게 떠오르곤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필연적인 ‘정리’의 과정이다. 자신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된다. 안도 유마의 심정도 그런 것이 아닐까.
30, 40대의 독자가 주류이긴 하지만, 가장 독자층이 폭넓은 <빅 코믹 스피리츠>에 연재되었던 『도쿄 80's』는 연재 초기부터 동시대를 겪은 30, 40대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고, 점차 대학생과 중고생에게까지 화제가 되었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만화’로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유는 『도쿄 80's』가 단지 80년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연애 그래피티’라는 말처럼, 그 시대의 풍경과 분위기, 그리고 정서를 진솔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도쿄 80's>의 구석구석마다, 80년대의 구체적인 풍경과 사물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글과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는 만화는, 그런 점에서는 최적의 장르다.
당시 도쿄는,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과거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던 곳이었다.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지방과는 달리, 도쿄는 ‘세계’의 모든 유행을 만나고, 그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멋진 ‘도시’였다. 시즈오카에서 온 준페이는 과거의 연인을 잊었고, 그의 친구들 역시 과거와 결별하고 싶어했다. 그들에게는, 절대로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었다. 촌스러운 옷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시험을 보러왔던 아이는, 1개월만에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신한다. 그들은 과거를 버리고, 국제화된 도시 도쿄에서 살아간다. 디스코에 테니스 서클 그리고 파티가 있는 80년대의 도쿄를.
80년대의 도쿄가 무엇인지, 그 시절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얼추 알고 싶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다. <도쿄 80's>를 끝날 때까지 보던가, 『도쿄 80's』 1권의 182쪽에 그려져 있는 준페이의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보는 것이다. 다카하시 루미코의 <메종일각>와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그리고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 책과 만화들이, 80년대 젊은이들의 필독서였다. 그리고 비트 다케시가 최고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야마구치 모모에와 핑크 레이디가 은퇴를 했고, <기동전사 건담>의 프라모델이 불티나듯 팔려나갔고, 오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가 개봉했고,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가 발매되었다. 그게 80년대 초반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스릴러>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80년대의 도쿄와, 우리가. 80년대의 도쿄와, 80년대의 서울은 정말 다르다. 디스코와 <스릴러>처럼 미국의 대중문화를 경험했던 것은 비슷하지만, 그 외는 전혀 다르다. 파티 문화도 없었고, 테니스 서클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 80년대 서울의 대학에서는, 이념 서클이 중심이었고,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시위가 대중적이었다. 80년대에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을 보낸 나는, 그러나 <도쿄 80's>가 흥미로웠다. 전혀 살아본 적이 없는 과거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공감을 느끼고 마치 나 자신의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모든 환경이 틀리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르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이 살아가는 일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도쿄 80's』는,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대학에 들어갔던 80년대의 서울, 그리고 친구들과 연인들을. 그것이 『도쿄 80's』를 집어드는 이유다.
<안도 유마> 글/<오히시 토모야> 그림3,420원(10% + 1%)
대학에 입학한 준페이는 시험장에서 만난 커닝녀, 모리시타 아이의 존재가 자꾸 마음이 걸린다. 친구들과 어울리던 밤, 한 미녀 선배가 준페이에게 다가오는데? 한층 무르익어가는 캠퍼스 연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