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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어느 순간 빠져들게 들게 되는 만화 - 『엠마』
19세기 말 영국의 메이드가 주인공. 카오리 모리의 『엠마』의 설명을 듣는 순간 '이상한 만화 아냐?'란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말'이란 단서가 좀 현실적이긴 하지만, 대체로 메이드가 등장하는 만화에는 약간 비현실적인 페티시즘이 깔려있다.
19세기 말 영국의 메이드가 주인공. 카오리 모리의 『엠마』의 설명을 듣는 순간 '이상한 만화 아냐?'란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말'이란 단서가 좀 현실적이긴 하지만, 대체로 메이드가 등장하는 만화에는 약간 비현실적인 페티시즘이 깔려있다. 원래의 메이드는 '하녀' 혹은 '객실종업원'이란 뜻이다. 만화에 나오는 메이드는, 거칠게 말하자면 특정한 복장을 하고 주인이나 손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여성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해주는, 다소곳하고 순종적인 여성. 그것이야말로 남성의 환상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메이드물은 '성인물'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메이드물인 『강철 전사 쿠루미』, 『하나우쿄대 메이드대』, 『핸드메이드 메이』, 『마호로매틱』 등은 그런 남자들의 환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만화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메이드물의 대다수에 등장하는 메이드가 인간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라는 점이다. 『강철전사 쿠루미』, 『마호로매틱』, 『핸드메이드 메이』 같은 작품에는 모두 메이드가 나온다. 진짜 여성이 메이드로 등장하면 너무 낯간지럽고, 다분히 여성을 비하하는 뉘앙스도 있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로 설정을 한 것이다. 안드로이드라면 일종의 주방기구처럼 '봉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헌신적인 봉사가 그나마 어색하지 않다. 『마호로매틱』이 조금 강도가 센 '성인용'이긴 하지만, 대체로 이런 만화들이 말하려는 것은 동일하다. 남자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여성이 최고라는 것. 메이드물의 본질은 『오! 나의 여신님』이나 『전영소녀』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메이드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에, 『엠마』를 직접 손에 들기까지는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엠마』는 기존의 메이드물과는 조금 다르다. 작가의 고백도 있지만, 그가 '메이드'의 과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엠마의 치마를 부풀린 장면에 집착을 하거나, 안경을 벗는 장면에 무려 한 페이지나 할애하는 등 카오리 모리는 메이드의 복장이나 동작을 묘사하는 데 대단히 공을 들인다. 비슷한 얼굴이 많이 등장하는 것에서 보이듯, 아직 작가의 그림은 다양하지 못하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메이드'의 동작을 묘사하는 것만은 대단히 탁월하다. 그 뿐이 아니다. 작가의 관심은 메이드가 '활약'하던 19세기 말의 영국에 막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도서관이나 무도회, 만국박람회장 등 그리기 어려운 풍경을 굳이 그려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애정이 한껏 느껴진다.
엠마는 스토너 부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메이드다. 스토너 부인은 18살에 결혼을 했고, 20살에 사별한 이후 30여년을 가정교사를 하다가 지금은 은퇴한 상태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로 떠돌던 엠마는 스토너 부인의 눈에 띄어 메이드 일을 하게 된다. '교육이란 건 어느 정도의 효과를 가진 것일까'란 생각으로, 스토너 부인은 아무 것도 모르는 엠마를 거둬들인다. 15살의 엠마는 단지 자신의 방이 생긴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고, 헌신적으로 스토너 부인을 섬긴다. 그것은 단순한 복종이나 돈을 매개로 한 봉사가 아니다. 스토너 부인은 엠마를 딸처럼, 엠마는 스토너 부인을 어머니처럼 여긴다. 그리고 스토너 부인이 또한 아들처럼 생각했던, 오래 전 가정교사를 했던 청년 윌리암은 엠마를 사랑하게 된다. 키스까지는 이루어지지만, 윌리암과 엠마의 사랑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귀족은 아니지만 부호인 윌리암의 아버지는, 윌리암이 메이드와 결혼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생각처럼, 말처럼 영국은 두 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귀족의 나라와 평민의 나라다. 두 나라의 국경선은 그 누구도 건너기 힘들만큼 높고 두텁다.
『엠마』는 카오리 모리의 첫 연재작이다. 아직 여물지는 않았지만, 『엠마』는 결코 허술한 작품이 아니다. 첫 화에서 윌리암과 엠마의 만남으로 시작된 『엠마』는 2권으로 넘어가서 스토너 부인의 죽음을 그려낸다. 조금 더 사랑을 이끌어가도 좋으련만, 『엠마』는 성급할 정도로 빠르게 험난한 사랑의 굴곡으로 넘어간다. 카오리 모리는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결코 감정에서는 조급하지 않다. 모리의 재능 하나는 아무런 대사 없이, 차분한 동작 묘사 몇 개로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이다. 엠마는 조금 수줍어하고, 말이 없는 여인이다. 엠마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말로 전달하기보다는, 미세한 동작과 떨림으로 표현한다. 모리는 그 작은 여운을 훌륭하게 그림으로 담아낸다. 스토너 부인이 엠마의 눈이 나쁜 것을 알게 되고 안경을 사 주게되는 상황이나 스토너 부인이 죽은 후 밤중에 혼자 거실에 내려와 불을 밝히는 장면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모리의 연출력이 이미 상당 수준에 올랐음을 알게 된다.
사실 『엠마』는 모든 것이 작가의 취향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만화다. 엠마가 안경을 쓴 이유는, 작가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취향의 강요는 때로 독자를 피곤하게 만들지만, 그 취향이 적절한 캐릭터와 스토리에 녹아들었을 때는 누구나 동감하게 된다. 안노 히데아키가 속한 가이낙스의 작품들이 그렇듯이.(개인적으로 메이드물을 싫어하지만, 『마호로매틱』은 종말 재미있다.) <엠마>는 카오리 모리의 취향이 주도하면서도,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엠마』는 캐릭터와 스토리, 사랑과 유머와 감동 등 어느 하나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잔잔하게 흘러가면서도 세상의 어떤 요소들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엄청난 사건이나 음모, 드라카믹한 상황들이 존재하지 않아도 『엠마』를 보다 보면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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