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봉석의 만화이야기
자신의 직업에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의 자기고백, 혹은 환상 - 『호에로 펜』
세상사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나 매한가지다. 어떤 일을 하던 고난이 닥치기 마련이고, 숱한 고통을 견디며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만 한다. 가게를 운영하거나, 자동차 세일즈를 하거나, 변호사를 하거나 다 마찬가지다.
세상사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나 매한가지다. 어떤 일을 하던 고난이 닥치기 마련이고, 숱한 고통을 견디며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만 한다. 가게를 운영하거나, 자동차 세일즈를 하거나, 변호사를 하거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예술가들이란 또, 보통의 사람들과 조금은 혹은 많이 다르다. 이를테면 ‘상상력’이란 것은 공산품을 만들 때처럼, 일정한 재료를 일정한 비율로 섞을 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떨 때는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발한 상상력이 마구 튀어나오다가도, 어떨 때에는 완벽한 백지 상태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술을 마신다던가, 이성을 만난다던가, 무작정 빈둥거린다거나 하는 등 개인마다 상상력이 발휘되는 원천이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어떤 방법도 소용없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는 그냥 푹 쉬는 것이 마지못해 택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하지만 당장 내일까지 뭔가 작품을 완성해야만 한다면? 자기 내키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 때 그 때 대중에게 공개한다면 좋겠지만 자본주의 하의 대중예술가들에게는 그런 호사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영화감독은 일단 크랭크 인에 들어가면 계획대로 촬영을 하고, 개봉일정에 맞추어야 한다.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면, 소설가 역시 그런 마감의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만화가는 어떨까? 조금 알려지기 시작한 만화가라면 대개 2, 3개 정도의 만화를 함께 그린다. 한국은 워낙 열악한 상황이라 점점 잡지가 사라지고 있지만, 일본 같은 경우는 주간지도 있고, 격주간지도 있고, 월간지도 있다. 다른 내용의 만화를 주마다 바꿔가며 그려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 일본에 갔을 때, TV에서 만화가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을 봤다. 『도쿄대학 이야기』와 『골든 보이』의 작가 에가와 타츠야의 ‘저택’이었다. 한 층은 갤러리이고, 한 층은 작업실이고, 옥상에 올라가면 욕조에서 큰 창을 통해 시부야와 신주쿠가 보이는 ‘저택’. 유명해지고, 일급의 만화가가 되면 그 정도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게 일본의 만화가들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나에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한 명의 승자가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패자가 뒤에 처지게 된다. 만화가로 성공하는 일도 결국은 생존경쟁이다. 『소년 점프』는 매호마다 독자에게 엽서를 받아 인기작품의 랭킹을 매긴다. 그 순위가 낮다면 점차 지면이 뒤로 밀리고, 조금씩 페이지가 줄고, 마침내는 조기 중단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더, 언제나 박차를 가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만화가가 주변에 있다면 충분히 알 수 있겠지만, 만화가의 생활은 꽤 흥미로운 것이다. 인간성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들의 생활 자체가 무척 다채롭다. 그런 이유로, 만화가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많이 있다. 하라 히데노리의 『언제나 꿈을』, 김나경의 『사각사각』, 요고 유키의 『코믹 마스터 J』 등이 만화가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이다. 『사각사각』은 만화가의 작업실 내부 풍경은 물론 편집기자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소동 같은 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그림은 사실적이 아니지만) 반면 하라 히데노리의 『언제나 꿈을』은 만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과 그를 사랑하는 역시 만화가 지망생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만화가의 꿈과 희망 그리고 슬픔과 고통까지 함께 그려낸다. 『코믹 마스터 J』는 곤경에 빠진 상황을 환상적으로 해결하는 어시스턴트를 주인공으로 묘사한, 다소 황당한 만화다.
시마모토 카즈히코의 『호에로 펜』은 『코믹 마스터 J』와 통하는 점이 많은, ‘열혈 만화가 만화’다. 제목인 ‘호에로’는 불타라, 울어라(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을 때의 제목이 『울어라 펜』이었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호에로 펜』은 호노오 모유류라는 이름의 만화가가 만화를 그리면서 벌어지는 온갖 상황을, 황당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킬러, 은행 강도, 요정 심지어 외계인까지 등장하며 만화가의 일상을 공상적으로 그려내지만, 그 안에 깔려 있는 현실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제 시간에 끝낼 수 없다’는 나약한 소리를 해 본적 이 없다. 예를 들어, 마감까지 앞으로 하루밖에 안 남고.. 24페이지의 원고가 아직 새하얀 채로 남아있다고 해도... 오히려 ‘하루만에 24페이지를 그려도 괜찮을까?’라든가...‘24페이지 분의 원고료를 하루만에 벌 수 있다니! 럭키!!’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극복해왔다.” 이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아마도 만화가라면, 아니 마감에 시달리는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일을 도와줄 어시스턴트가 자전거로 달려오다가 부상을 입은 후에 하는 말이 “좋아! 오른손은 안 다쳤다”이고, 전대물의 대사에 감동을 받아 자료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살인현장을 목격한 후, 겨우 범인을 잡은 다음, 힘들어하는 어시스턴트에게 호노오가 던지는 말은 ‘진정한 히어로가 되는 것은 지금부터다’이다. 늘 상황은 그럴 듯 하지만,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에스컬레이트되고, 결국 엄청난 비약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 어처구니없음, 그러면서도 그 안에 깔려 있는 만화가 자신의 진실한 고백이 독자를 그 열혈에 빠져들게 만든다.
“열심히 만들었다고 항상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이....세상은 혼을 담아 만들어 내는 것과 잘 팔리는 것과는 엄밀히 말해 별개. 그런 건 어찌되건 나와 상관없다!”는 말이나 “분명 만화는 스토리가 중요하다. 내용도 확실한 편이 좋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란 말을 듣고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 ‘열혈’에 동감할 수 없다. 『호에로 펜』의 재미는 바로 그것이다. 『호에로 펜』은 자신의 직업에 목숨을 걸고 있는, 그 작업이 너무나 재미있고 즐거우면서도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작가의 자기고백이자 환상이다.
『호에로 펜』을 보고 있으면 시마모토 카즈히코가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충만한 기쁨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만화가라는 인간형이 궁금하다면, 아니 자신의 직업에 즐거움이 빠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당장 『호에로 펜』을 펼쳐봐라. “만화 따위를 그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맞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만화 따위를 그리고 있을 틈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린다!” 그것이 바로 만화가의 자세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새겨야할 말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고, 아무리 의미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자신의 일에 즐겁게 헌신하는 것. 만화만이 아니라, 세상 역시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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