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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오가는 전쟁터, 좌충우돌 풋내기 인턴 - 『헬로우 블랙잭』
요즘 일본만화계에서는 최대의 화제작으로『헬로우 블랙잭』이 꼽힌다. 해양 구조대원의 이야기『해원』을 그렸던 샤토 슈호가 그린『헬로우 블랙잭』은 의과대학을 막 졸업하고 인턴 생활을 시작한 풋내기 의사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그린 의학만화다.
요즘 일본만화계에서는 최대의 화제작으로『헬로우 블랙잭』이 꼽힌다. 해양 구조대원의 이야기『해원』을 그렸던 샤토 슈호가 그린『헬로우 블랙잭』은 의과대학을 막 졸업하고 인턴 생활을 시작한 풋내기 의사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그린 의학만화다. 작년 10월 1, 2권이 출간되어 175만부가 팔렸고, 다시 나온 3, 4권으로 410만부를 기록했다. 올해 초 일본 문화청에서 주관하는 ‘문화청 미디어 예술상’을 수상하고, TV드라마로도 만들어지는 등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제목의 ‘블랙잭’은 일본만화의 신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블랙잭』의 주인공 이름을 따온 것이다. 신기의 의술로 절대 불가능이라는 수술을 성공시키는 암흑의 의사 ‘블랙잭’. 데츠카 오사무가 창조한 캐릭터 중에서 아톰이 아이들의 영웅이라면, 블랙잭은 성인의 반영웅이다. 일본만화 베스트 10을 꼽으면 항상 10위 안에 들어가고 애니메이션과 TV드라마, 영화 등으로 수없이 각색된 명작이다. 그 ‘블랙잭’에게 인사를 하는 ‘헬로우 블랙잭’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거장의 명작을 제목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그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면, 아니 적어도 수작이라는 평가를 얻지 못한다면 단지 ’블랙잭‘의 이름을 거론했다는 것만으로 선정주의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좋은 평가를 얻는다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 수 있고 그 도전정신에도 더욱 더 공감할 수 있다.
『헬로우 블랙잭』을 열면 놀랄 일투성이다. 졸업하는 데만 5, 6천만엔이 족히 드는 일류 의대를 나온 인턴의 월급은 단 3만 8천엔(약 40만원)이다. 집값이 비싼 일본에서는 생활이 전혀 불가능한 액수다. 집안이 부유하지 않다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한다. 아르바이트는 개인병원에서 당직을 서는 것이다. 그러면 단 하루에 적어도 8만엔은 받는다. 분명 뭔가 불합리하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개인병원은 의사가 절대부족이기 때문에 인턴이 혼자 당직을 서는 경우도 많다. 의대를 갓 졸업하고 시험에 붙은 인턴이 당직을 서다가, 아무 환자나 실려오면 처방을 해야 한다. 응급환자가 실려오면, 긴급수술도 해야 한다. 인턴이, 아직 아무 경험도 없는 인턴이…….
그뿐이 아니다. 일본 의료계는 의국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대학병원에서는 제1외과 의국, 제1내과 의국, 안과 의국 등의 의국 공동체가 있다. 대학병원은 물론 사립병원, 개인병원까지 대부분의 의사에게는 출신 의국이 있다. 민간병원에 의사가 필요하면 대학의국과 상의해서 의사를 조달받는다. 의사 확보를 위해서는 대학의국에 의존해야 하고, 의사 역시 의국에 취직되지 않으면 취직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의국 마피아’라고도 불린다. 의국에서 한번 추방되면 조그만 개인병원에서 떠돌 수밖에 없다. 아니면 일찌감치 위대한 위술을 연마하여 블랙잭이 되거나 휴머니즘적인 닥터 베어처럼 독자적으로 활동하든가. 결국 의사란 존재도, 처세술이 좋아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여느 세상처럼.
장황하게『헬로우 블랙잭』이 고발하는 내용을 설명한 이유는, 이 모든 모순이 주인공인 사이토의 험난한 여정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교사의 아들인 사이토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다. 그래서 민간병원에서 당직을 서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긴급수술을 요하는 환자를 만난다.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다가는, 내빼버린다. 밤중에 와서 수술을 한 원장은 “내버려둬도 죽어. 어차피 죽을 바엔 배를 열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으니까!…… 의사 면허를 취득한 순간부터 자넨 평범한 사람이 아냐! 의사야! 강해지게!”라고 말한다. 의료재정을 압박한다는 이유로 75세 노인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자, 사이토는 저항한다. 의사는 환자를 구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그후 순환기 내과로 갔던 사이토는 심근경색 환자인 미야무라의 처리를 놓고 심장외과와 대판 붙게 된다. 마침내 환자를 빼돌려 의국에 속하지 않은 ‘명의’에게 수술을 받게 한 후, 사이토는 따돌림을 받게 된다.
사이토는 일본만화 특유의 ‘열혈’ 주인공이다. 21세기가 되어도, 열혈 주인공은 여전히 활약을 멈추지 않고 있다. 1권에서 사이토는 말한다. “난 더러운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아”라고. 그래서 사이토는 싸운다. 환자를 단지 돈으로 생각하는 태도로, 환자의 생명보다는 자신들의 안위와 출세를 중시하는 의사들과.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조직의 문제점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열혈’ 주인공은 꽤 호감이 가는 편인데,『헬로우 블랙잭』의 사이토는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3권의 표지가 눈물을 글썽이는 사이토의 모습인 것처럼,『헬로우 블랙잭』은 지독한 감정 과잉, 열혈 과잉이다. 그래서 사이토가 선배들에게 개길 때, 때로는 선배들에게 공감하게 된다. 사이토를 ‘선하고 순수한’ 쪽으로만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건 거슬린다.
하지만,『헬로우 블랙잭』이 다루는 건 생명이다. 범죄나 도박 등 개인의 선택에 의해 전개되는 세계와는 다르다. 그들은 단지 병에 걸렸을 뿐이다. 사이토는 그들을 구해야 하는 의사다. 의사는 무엇을 하는 인간인가. 그 가장 단순하고도 엄중한 질문을『헬로우 블랙잭』은 던지고 있다. 3권에서 사이토는 신생아집중치료실로 가게 된다. 대부분의 의국이 거부를 했기 때문에, 누구나 꺼리는 곳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미숙아들을 돌보던 사이토는 쌍둥이 미숙아를 만나, 정면으로 생명의 존재를 고민하게 된다. 생명이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생명을 다룬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의사는 때로 신이 되어야 한다.『헬로우 블랙잭』은 신이 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리고 있다.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약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에 강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인간이라는 존재를『헬로우 블랙잭』은 말해준다. 그래서『헬로우 블랙잭』은 때로 신파가 되지만, 거기서 때로 진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족으로,『헬로우 블랙잭』은 사실에 충실하다. 일본 의료계에 대한 방대한 자료와 사실적인 병원의 풍경과 수술 장면 등 모든 것에 충실하다. 그것만으로도『헬로우 블랙잭』은 칭찬받을 만하다. ‘사실’의 천착은 언제, 어디서건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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