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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길 물속은 알아도 열 길 일본인 속은 모른다

일본 사회의 기초 – 온, 기리,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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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월드컵 첫 경기였던 토고전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 한국인들이 꽤 유심히 지켜봤고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보도한 경기가 있었는데, 바로 일본과 호주의 경기였습니다. 2002년의 신화를 일궈내어 한국인이 ‘우리 편’으로 여기는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호주 축구팀와 일본의 경기였는데요, 일본의 역전패라는 결과에 많은 한국인이 기뻐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일본, 한국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일본에 대한 이러한 한국의 평가와 관심 덕분에 일본 관련 서적은 『축소지향의 일본인』(이어령), 『일본은 없다』(전여옥) 등 상당한 판매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일본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의 경제성장에는 감탄하며, 일본의 과거 만행에 치를 떨면서도 그들의 애니메이션과 만화에 놀라워합니다. 밉지만 한국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진 일본, 그 일본에 관해 알고자 한다면 일본을 가장 잘 분석했다는 평가를 듣는 책 한 권쯤은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국화와 칼』은 대단히 실용적인 목적에서 집필된 일본 분석 보고서입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미국은 이 생뚱맞은 동양의 군국주의 국가가 전쟁 이후에 어떤 패턴을 보일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과거 서양인들이 치렀던 전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포위된 상황에서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것이 당연한데 일본군은 놀랍게도 전원이 무릎을 꿇고 군도로 자신의 배를 가르고 죽어버리는가 하면, 전투기 조종사들이 비행기에 폭탄을 매달고는 미군 군함에 자폭하여 공격하는(가미가제神風) 기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분명 서양인의 정신, 문화패턴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 미국 정부는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인의 정신세계와 그 특성을 파악하는 연구를 요청하고,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국화와 칼』입니다. 그런 실용적인 목적으로 집필하였기에 책이 다루는 일본의 모습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일본인이 보여주는 행동 패턴 하나하나에 그들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덧붙여 설명해 가면서 일본만의 독특한 행동양식을 그려낸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에 관한 가장 정석적인 연구서로 손꼽히며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국화는 일본 천황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고, 칼은 일본 전통의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의 상징입니다. 평화의 상징과 무력의 상징이 나란히 책의 제목에 배치된 것 자체로 저자는 일본이 갖는 특유의 양면성을 설명합니다.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 공존할 수 있는 독특한 일본만의 문화체계를 그들 고유의 습성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전후 현대 일본인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고 설명함으로써 일본이라는 이질적 문화 공동체를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책에서 설명하는 일본인의 정신세계의 배경은 사실 한국인에게는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닙니다. 일본인의 행동 패턴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가장 크게 비중을 두는 부분은 정신적 채무에 관한 부분입니다. 온恩, 기리義理 등은 우리에게도 은혜, 의리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정신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중-일 공통의 동아시아적 정신개념이 매우 생소한 서양인들에게는 이것이 놀라울 수도 있습니다. 온恩이란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말에서는 그냥 은혜지만, 일본의 ‘온’ 개념은 매우 경직된 수직적 사회 속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개념입니다. 오랫동안 봉건적 질서가 유지된 일본 사회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온’은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주가 신하에게 온을 베풀면, 그 온을 받은 신하는 반드시 군주가 내린 온 이상의 노력으로 군주에게 은혜를 갚아야만 합니다. 단, 국가나 군주, 부모로부터 받는 ‘온’은 무엇을 어떻게 해도 다 갚을 수 없는 무한한 개념인지라 평생 전력을 다해 갚아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됩니다. 이를 기리義理라고 하는데, 이 기리는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온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반드시’라는 조항을 성립시키기 위해 일본에는 하지恥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지란, 수치심입니다. 온을 받은 자가 그 온을 제대로 갚지 않는다면, 그는 주변으로부터 온갖 모욕과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일종의 왕따를 당해 죽는 것보다 더한 치욕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 일본의 과거였습니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만화 『배가본드』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주인공은 1권에서 패잔병으로 등장하는데, 당시 일본에서 패잔병은 군주의 온을 받아 살면서 그 온을 갚기 위해 전투에 나갔으나, 온을 갚기 위해 죽지 못하고 도망친 자를 가리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하지입니다. 온을 받은 자가 죽음으로써 온을 갚지 않고 제 목숨만 생각하면서 도망치는 경우에 하지가 발생하며, 그는 평생 패잔병이라는 하지의 굴레를 쓰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대단히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는 사회입니다. 남에게 피해든 이익이든 아무런 관계없이 주는 것 자체를 서로 꺼립니다. 남에게 이유 없는 친절을 베풀면 친절을 받은 이는 온을 받은 것이 되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아 줘야 하는 부담을 갖기 때문에 ‘남 좋은 일’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하지는 타인으로부터 격리되는 일종의 이지메와도 같은 현상을 일으키며, 이는 일본에서는 사형 선고보다도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온’을 갚는 행위는 강제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역사가 계속 반복되면서 일본 특유의 고유한 도덕 코드가 형성되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적 문화관습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점은 매우 큰 차이를 낳습니다. 서양의 관념이 선과 악, 이분법에 기초해 형성된 절대적 개념이라면 일본의 관념은 개인과 개인 상호에 발생하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이 때문에 일본인에게는 선과 악의 개념이 뚜렷하지 않다고 루스 베네딕트는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에서처럼 ‘이것이 선이고 저것이 악’이라는 명확한 지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관계 속에서 인정받는 것이 사회관습의 제1목적인 분위기 속에서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인 이분법 규정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일본인의 사고와 행동 패턴을 바탕으로, 2차대전 말기를 다시 한 번 베네딕트의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일본군은 천황의 군대이며, 천황으로부터 ‘온’을 입은 군대입니다. 그 ‘온’은 군인으로서 죽음을 다해 갚아야만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전장에서 미군에게 항복하거나 도망친다면 ‘온’을 갚지 못한 채 평생을 ‘하지’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죽는 것만 못한 하지를 가지고 사느니, 그들은 죽음으로써 천황에 대한 ‘기리’를 수행한 것이지요. 단, 이러한 일본인의 행동 패턴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가 ‘온’에 대해 부정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됩니다. 내가 천황에게 받은 게 없다고 생각해도, 군대 조직과 일본 사회는 ‘기리’를 다하지 않는 모습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는 일본에서 남들과 다르게 튀는 행동, 전장에서 제 목숨 챙기는 행동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시선과 관계가 서로 중첩되어 타인의 시선이 도덕 규율의 중심이 된 독특한 문화규범이 일본의 행동 양식을 만든 것이고, 그랬기에 일본은 죽음으로 항전하다가도 항복 직후엔 가장 유순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은 국화보다는 사쿠라(벚꽃)가 더 상징적입니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을 지켜보노라면 과연 그들에게 ‘온’이나 ‘하지’ 같은 개념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많은 세월이 지나 당시의 연구결과가 오늘날의 일본까지 100% 설명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우리가 이른바 일본정신, 일본혼이라고 일컫는 그들 정서 깊은 곳의 무언가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에 대한 베네딕트의 명쾌한 해설 덕분에, 우리는 일본의 행보를 지켜보며 ‘아, 저 행동은 일본인의 이러한 성격 때문인 거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써낸 보고서가 기초였기에 그 정확성과 깊이가 실용적인 탄탄함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참고로 『국화와 칼』은 베네딕트가 전쟁 중 보고서로 제출한 『일본인의 행동패턴』을 새롭게 써서 출간한 책으로, 원보고서도 출간되어 있으니 비교하여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 『국화와 칼』은 어떤 책? 국화와 칼로 상징되는 극단적 형태의 일본문화를 다각도로 탐색한 미국 인류학자의 저서. 연구과제를 크게 전쟁 중에 일본인, 메이지 유신, 덕의 딜레마, 인정의 세계, 자기수양, 패전 후의 일본인 등으로 나눠 문화인류학적으로 깊이 있게 탐구했다. ------------------------------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누구?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09년 바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어학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하다 생화학자인 스탠리 베네딕트와 결혼, 1919년 인류학에 접하게 되고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절대적인 스승 프란츠 보아스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인류학 연구에 빠져들어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들의 민화와 종교를 연구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인류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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