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습니다.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키, 가격이 드러나는 비싼 명품과 스포츠카로 무장한 그는 재벌 2세로, 유학까지 다녀와 지금은 아버지 회사에서 중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그에게 한 여자만큼은 존경의 시선을 가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번 같이 놀자는 그의 오만방자한 제의에 여자는 따귀 한방으로 대답을 대신하는데요, 따귀 맞은 남자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귀여운데?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위에 말씀드린 이야기가 절대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요즘 TV를 장악하고 있는 로맨스 드라마들의 이야기 구조는 절대 저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우스갯말로 “부잣집 아들 ‘꼬시려면’ 다짜고짜 ‘싸대기’ 한대 날려주면 된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요. 꼭 요즘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로부터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로맨스는 다양한 이야기의 소재로 쓰였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주제였습니다. 그러한 로맨스 중에서도 가장 선두 주자로 꼽히고 오랜 세월동안 사랑받아온 대표 고전 한 편이 최근에 새롭게 영화화되어 재조명받고 있는데, 바로 『오만과 편견』입니다. 영국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사는 베넷 씨 가족은 베넷 씨와 부인, 다섯 명의 딸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시골 중산층입니다. 다섯 명의 딸을 어떻게 하면 훌륭한 남자에게 시집 보낼까가 최대 과제인 베넷 부인에게 어느 날 희소식이 날아드는데, 바로 옆 저택에 연 수입이 사천 파운드가 넘는 준수한 청년이 새로 이사 온다는 소식입니다. 베넷 가의 숙녀들뿐 아니라 온 동네의 결혼적령기 처녀들 모두가 술렁이면서 새로 이사 온 청년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그의 이주를 환영하기 위한 무도회에서 사람들은 새로 오게 된 빙리 씨와 그의 돈 많고 훤칠한 친구 다아시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돈 많고 매너 좋고 교양 있고 외모까지 괜찮은 빙리 씨에게 마을 처녀들이 모두 마음을 뺏기지만, 첫 무도회부터 빙리 씨는 베넷 가의 첫째 딸 제인과 오랫동안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가져갑니다. 맏딸 제인 베넷은 아름다운 외모와 기품, 교양을 갖춘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숙녀로, 빙리 씨와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 커플이 될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만인의 동경을 받는 빙리 씨와는 달리 그의 친구 다아시는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을 듣게 됩니다. 런던의 부잣집 아들인 다아시는 막대한 재력과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무도회에서 시골 숙녀들과 잘 어울리려 하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오만한 구석을 보여 사람들로부터 건방진 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편견의 가운데에는 베넷 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 베넷이 있습니다. 언니 제인보다는 뒤처진다고는 하지만 빼어난 외모에 명랑한 성격과 명석한 판단력을 자랑하는 엘리자베스는 한눈에 다아시의 오만함을 보고는 건방진 인간으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그녀는 자신의 명석한 판단력을 깊게 신뢰하여 한번 안 좋은 인상을 가지면 그걸로 그 사람의 이미지가 굳어져 버리는 성격입니다. 결혼은 돈이나 가문이 아니라 정말 마음이 가는 사랑으로 해야 행복하다고 믿는 엘리자베스는 당대의 어느 숙녀보다도 자유분방한 연애관과 성격으로 살아가는 쾌활함의 소유자인데, 바로 이 점이 런던의 신사 다아시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오만한 남자와 오만한 남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여자가 만나 얽히고설킨 사건을 겪어가며 만드는 로맨스로 진행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로맨스와 기본 뼈대는 유사하지만, 『오만과 편견』의 무대는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동일한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치는 영국 어느 시골마을입니다. 소설 자체에서 이러한 역사적/지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직접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배경 요소는 소설의 전개와 분위기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이 갓 일어나 기존의 왕족/귀족 중심체제가 무너지고, 방직 공업의 발달로 인해 원료인 양모의 주 생산지인 시골 지주들이 이른바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힘을 갖춰나가던 때였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베넷 가도 일정한 토지를 소유한 지방 지주 가문이고, 주인공 다아시와 친구 빙리 또한 더비셔 지방의 비옥한 토지를 가진 지주입니다. 중세의 로맨스들이 대개 왕자(영주의 상속자도 포함됩니다)와 결혼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면, 산업혁명 이후의 로맨스 남자주인공은 새 시대의 부유층인 계급, 젠트리Gentry가 되는 것이지요. 소설 속에서 유달리 사교계의 매너가 강조되는 것도 그러한 사회적 변동에 의한 영향입니다. 새롭게 상류층으로 부상한 젠트리 계급은 과거 귀족들에 비해 풍요로웠지만 귀족들만큼의 비물질적 명예는 갖지 못했습니다. 신분에 의해 상속 가능했던 귀족이라는 고귀한 신분 대신 이들이 비물질적 상류층 요소로 가졌던 것은 이른바 신사도Gentlemanship인데, 단순히 돈이 많은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던 상류층 문화를 만들어낸 핵심 개념이었습니다. 신사도에는 여성에 대한 품위와 예절, 르네상스 이후 방대해진 인문학적 지식에 관한 교양, 예술적 식견, 화술 등이 모두 포함된, 말 그대로 새로운 상류층을 위한 예의범절의 총체였습니다. 기존 귀족사회에서 천한 사람으로 차별받던 젠트리들은 신분 상승을 이루면서 스스로를 상류층으로 만들기 위한 특별한 매너가 필요했고, 그랬기에 그 매너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성스러운 것으로 더욱 심각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베넷 부인이 다섯 딸에게 끊임없이 사교계 진출을 위해 여러 가지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상류층에 속하는 젠트리들과 딸의 결혼을 이뤄내기 위한, 목적의식이 뚜렷한 학습의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당시의 사교계 매너라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추잡한 말장난입니다. 사교계 진출을 위한 교양은 인간 스스로를 갈고 닦기 위함이 아닌, 한 여성을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성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옵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이는 소설 전체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도회라는 장소는 ‘좋은 데 시집가기 위해’ 가식으로 무장한 숙녀들이 초대받고, 능력 있는 남성들이 마음에 드는 숙녀들을 향해 춤을 청하고 교제하고 청혼하는 공간이며, 대놓고 돈 많은 남자와 예쁜 여자가 맺어지는 문화적 빈곤 현상을 애써 피하기 위해 사교계라는 특수한 인적 커뮤니티를 형성한 것입니다. 주인공들은 이러한 사교 문화의 틀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틀을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는 것이 두 사람의 유사점이자 서로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다아시는 애초에 무도회장에서 모르는 여자들과 춤추는 것이 전혀 내키지 않는데, 이는 다아시 스스로가 무도회나 사교 문화가 가진 가식적 속성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아시는 시골 여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자신의 재산과 신분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과의 결혼을 노리는 그런 시골 여자들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춤추는 일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로, 틀에 박힌 형식적 인사와 매너보다는 사람의 진실을 꿰뚫어봐야 진정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로맨스가 성공할 일련의 가능성을 엿보게 됩니다. 『오만과 편견』은 같은 로맨스를 다루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가식과 허영이 가득한 로맨스 시대를 다루었다는 부분에서 다른 로맨스보다 강한 여운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가식 속에서 부자와의 결혼만을 꿈꾸는 세태 속에 부자 남자를 단호히 거부했던 한 여자와, 모두가 가식과 허영으로 자신을 대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단점을 짚으며 거부한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 지독한 가식의 세태였기에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은 당시에는 더욱 새롭고 당돌한 로맨스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집안도 미천하고 재산도 별로 없는 엘리자베스가 가식과 허영의 물결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부자 남자와 결혼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엘리자베스와 유사한 입장에 놓인 대다수 평범한 독자들에게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입니다. 남성중심사회가 오랜 역사를 가져오는 동안 결혼은 피지배적 입장의 여성에게는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유일한 통로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랬기에 로맨스 스토리의 남성 주인공은 언제나 능력이 좋은 남자(왕자나 영주가 대부분이고, 심지어는 국가가 없었던 인디언의 경우에는 솜씨 좋은 사냥꾼으로 등장합니다)였고, 여성은 무도회장에서 ‘능력 좋은 남성의 춤 신청을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만을 견지해 왔습니다. 그런 로맨스 판타지 속에서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능력 좋은 남자를 처음에 뿌리쳤다가 나중에 자신의 마음이 돌아서고 나서야 선택하는, 시대적 제한에 묶여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자기 선택을 보여주는 여성상을 보여줍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직접 부잣집 남자를 고를 수 있다’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바로 그러한 모습이 다아시에게는 매력이었고, 18세기 말의 독특한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배경 속에서 두 사람의 로맨스는 여타의 밀고 당기기를 넘어선 새로운 재미를 줍니다. 여성이 아직 시대라는 굴레에 묶여 있었던 18세기 말, 그 제한된 공간에서나마 여성의 선택권을 보여주었던 『오만과 편견』을 보면 최근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급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의 자유로움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국의 로맨스 판타지가 안타까워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여성의 권위가 단지 부자남성을 거부하는 것에서 ‘싸대기’ 때리는 것 정도로만 상승한 것일까요? --------------------------------------- 『오만과 편견』은 어떤 책? 하트포드셔의 작은 마을에 사는 베넷 가에는 다섯 자매가 있는데, 그중 위의 두 명이 적령기를 맞고 있다. 온순하고 마음이 착하며 만사에 내성적인 맏딸 제인에 비해,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재치가 넘치는 발랄한 아가씨였다. 제인은 근처에 이사 온 늠름한 청년 빙리를 사랑하게 되지만, 신중하게 자기 애정을 숨긴다. 빙리의 친구 다아시는 겉치레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성격 연구가임을 내세우는 엘리자베스의 눈에 신분을 내세우는 ‘오만’한 남자라는 인상으로 비친다. 결국 다아시는 자유롭고 활달한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다아시는 베넷 부인과 아래로 세 명의 딸들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더 이상 엘리자베스와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꺼려하였다. 빙리 역시 제인을 사랑하고는 있었으나, 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자신을 못한 채, 결국 이들 두 청년은 그 땅에서 떠나간다. 다아시는 그 뒤에 신분 격차와, 저속한 중매인에 대한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엘리자베스에게 구혼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오만’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그의 구애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는 경박하고 낯이 두터운 콜린스와 싹싹하기는 하지만 성실하지 못한 위컴과 만나면서 결코 첫인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러 가지 사건과 집안 문제에 부딪히면서 엘리자베스는 다아시가 너그럽고 사려 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편견’을 고치기로 결심한다. 이전에는 빙리와 제인의 사랑을 의심하여 결혼을 만류했던 다아시는 그들의 사랑을 믿고, 오히려 그들의 결혼을 주선한다. 이어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도 이해와 사랑과 존경으로 맺어진다. --------------------------------------- 저자 제인 오스틴은 누구? 1775년 12월 16일 영국의 햄프셔 주 스티븐턴에서 교구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습작을 하다가 15세 때부터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21세 때 첫 번째 장편소설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1796년 남자 쪽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는 와중에, 후에 『오만과 편견』으로 개작된 서간체 소설 『첫인상』을 집필한다. 그러나 출판을 거절당하고 다시 여러 작품의 집필과 개작 활동을 꾸준히 한다. 180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형제, 친척,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1809년 다시 초턴으로 이사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이 기간에 『분별력과 감수성(Sense and Sensibility)』(1811),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1813),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1814), 『에머(Emma)』(1815) 등을 출판하였다. 이 책들은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호응을 얻고 그녀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는다. 1817년 『샌디션(Sandition)』 집필을 시작한 뒤 건강이 악화되어 집필을 중단하고, 4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노생거 사원(Northanger Abbey)』과 『설득(Persuasion)』은 그녀가 죽은 뒤인 1818년에 출판되었고, 후에 그녀의 습작들과 편지들, 교정 전 원고와 미완성 원고가 출판되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영화화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제인 오스틴> 저/<윤지관>,<전승희> 공역11,700원(10% + 5%)
영국 BBC의 '지난 천년간 최고의 문학가' 조사에서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를 차지할 만큼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 그녀의 대표작『오만과 편견』은 1958년 이후 34종의 변역본이 출간된 이해 현재까지도 15종 이상의 번역본이 판매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인기 비단 영국 뿐이 아님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