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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조부터 멸망까지, 거대한 서사 속으로

장대한 서사, 그러나 주의해서 읽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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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20세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발생한 장르입니다. 그 이전에도 유럽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는 엘프와 드워프, 드래곤과 켄타우로스 등이 나오는 신화와 전설이 많이 존재했지만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 속에서 나름의 체계와 세계관을 갖추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대중문학물로서는 20세기가 그 첫 발현 지점입니다. 그 선두 주자, 이른바 판타지의 고전이라 꼽히는 작품들 중 『나니아 연대기』는 유독 한국에서는 그 인지도가 『반지의 제왕』등에 비해 낮은 편에 속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만 해도 놀랐던 사실은, 초등학교 때 교실 문고판 책꽂이에 꽂혀 있던 한 권의 책에서 본 내용이 나니아 연대기 2부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내용과 너무 똑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다가 옷장을 통해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고, 그안에서 마녀와 싸우는 이야기지요. 아마도 나니아 이야기의 한 부분만 국내 전집 출판사에서 따다가 낸 문고판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원본인 『나니아 연대기』2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내용이 바로 이번에 영화화되는 부분입니다. 주인공 격인 네 남매는 전쟁중 런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시골에 사는 삼촌 디고리 교수의 집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그 집에서 아이들은 옷장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고 나니아라는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 나니아의 창조주인 아슬란과 함께 마녀를 물리치고 왕좌에 오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계속 디즈니가 후속편들을 영화화할 예정이며, 이에 따라 책 또한 새롭게 구성한 판형으로 다시한번 독자들 곁에 찾아왔습니다. 디즈니의 영화화를 통해 다시한번 한국 독자들에게 정식 이름인 『나니아 연대기’를 달고 선보이게 된 이 장대한 판타지물은 『반지의 제왕』과 동시대에 나온 판타지이면서도 서로 조금씩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은 아예 현재를 사는 우리와는 동떨어진 '중간계'라는 세계를 설정해 그 안의 역사를 자체적으로 진행시키고 그 한 토막을 잘라 보여준 작품이었고, 『나니아 연대기』는 주인공들이 독특한 장치와 설정을 통해 이른바 이계(異界)로 넘어가서 활약을 펼친다는 시작의 차이를 갖습니다. 최근 한참 쏟아져 나오는 한국의 퓨전 판타지물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현실과 가상세계간의 워프 게이트Warp Gate를 통한 교류를 보여주고 있고, 직접적으로 워프 게이트를 보여주는 『이상한 나라의 폴』이나 기차역 벽면을 뚫고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는 『해리 포터』시리즈 등도 『나니아 연대기』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연대기라는 제목이 어울린다고 생각할 정도로 방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상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 판타지이긴 하지만, 그 시작부터 멸망까지를 통째로 다루는 것은 중간 한 토막을 다루는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서장 『마법사의 조카』편에서 나니아 세계의 창조자인 사자 아슬란이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며 세계와 생명을 창조하는 장면부터 종장 『마지막 전투』에서 그를 따르는 이들과 함께 진정한 나니아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여는 것까지, 한 세계의 시작과 멸망을 시리즈 한 편에서 통째로 그려냅니다. 그렇기에 총 7편에 달하는 내용들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쏟아지며 방대한 시간과 인물, 사건으로 독자를 압도합니다. 게다가 하나 하나의 사건들은 앞뒤의 사건과 정확한 인과관계를 만들면서 유기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나니아 세계를 디자인한 실질적 창조주인 작가의 상상력에 저절로 감탄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합본판의 거대한 책 사이즈 뿐 아니라 내용마저도 방대해 판타지물이라고 웃음을 흘리며 책을 잡은 저의 여유로움은 단 한방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세계의 창조와 멸망을 다루는 이 거대한 이야기의 줄기는 이미 알려진 바대로 성경에 기초하는 바가 큽니다. 사실상 나니아의 주인이자 연대기의 주인공 급인 지혜로운 사자 아슬란은 현명함과 침착함을 갖춘 존재이며, 1편에서 악당으로 나오는 하얀 마녀에게 달콤한 터키 젤리로 유혹당해 넘어간 에드문드를 위해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희생정신을 보입니다. (게다가 그는 나중에 부활하여 더욱 강한 힘을 보이는데, 이는 예수가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보여준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서장인 『마법사의 조카』가 나니아 세계에 대한 창세기가 되겠고, 종장 『마지막 전투』는 요한계시록이 되겠지요. 그 장대함과 빈틈없는 구성에는 찬사가 아깝지 않지만, 『나니아 연대기』또한 판타지라는 장르적 한계에서 발생하는 갑갑함이 없지는 않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백인 중심의 서쪽 사람들을 절대선으로, 괴물과 흑인 등이 뒤섞인 동쪽 사람들을 절대악으로 묘사한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사례로 지적되듯이, 『나니아 연대기』또한 그런 인종주의적 편가르기에 상당부분의 갈등 요소를 기대고 있습니다. 각 편마다 등장하는 나니아을 위협하는 세력들의 존재는 아슬란 중심의 나니아 세계와 결코 공존할 수 없으며, 종장에서의 아슬란 또한 이른바 '진정한 나니아'라는 천국을 암시하는 세계로의 이동에서 그들을 배제합니다.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다른 판타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외모중심의 인종주의인데, 언제나 인간을 닮은 이들은 선하며 인간과 다르게 생긴, 내지는 인간의 관점에서 추한 외모를 가진 생물들은 악의 편에 배치됩니다. 가장 미묘한 것은 아슬란이 창조했다는 '나니아'가 가리키는 지칭의 범위입니다. 그는 분명 나니아 세계의 생명을 만들고 동물들을 말하게 만들지만, 그가 만든 나니아 세계의 남쪽에는 칼로르멘이라는 또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아슬란이 세계의 창조자라는 말은 그래서 자민족중심주의의 함의를 갖습니다. 나니아 외의 세계는 세계가 아니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애초에 그의 창조물이 아닌 것은 논외의 대상이 되며, 완전히 '타자'로 구분되고 단지 나와 다른 세계라는 이유로 적으로 설정되고 맙니다. 성경의 구약 편에서도 이는 유사하게 드러나는데, 성경의 창조주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 숭배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징벌하지만 그 외의 민족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징벌하지는 않습니다. 언뜻 보면 다른 신념에 대한 관용이지만 사실상 그들을 야만화하고 적대시하는 전체의 시점을 고려할 때 이는 자민족중심주의의 근원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교리에서의 서사를 바탕으로 한 어린이 동화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백인 국가도 아닌 제3세계 한국에서 이 이야기가 가지는 의미는 유럽이나 미주의 국가에서 읽히는 나니아 연대기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자칫 책 읽는 어린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니아의 정체성에 동일화시키면서 이른바 서구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세계 3대 판타지 소설로 꼽히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중 반지의 제왕을 제외한 두 편은 매니아가 아닌 국내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책들이었습니다. 매우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지만 『나니아 연대기』의 서사성과 치밀한 사건 구성, 폭넓은 등장인물과 생생한 캐릭터, 그리고 (동의하지 않을 분들이 있기도 하지만) 절대선의 화신인 아슬란의 카리스마는 개인적으로는 『반지의 제왕』보다 매력적일 수 있는 요소였습니다. 이번에 디즈니가 영화화한 『나니아 연대기』는 2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부분으로, 많은 이들이 종장과 더불어 가장 스펙터클한 편으로 꼽은 부분입니다. 판타지의 재미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흥미로운 요소들을 상상 속에서나마 제대로 뿜어내는 데 있다면, 책만큼이나 이번 영화도 기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화화된 소설들이 그렇듯이, 소설을 읽지 않고 본다면 놓치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전편 다 읽기가 부담스러우시다면, 나니아 세계의 시작을 알려주는 천년 앞 이야기 『마법사의 조카』와 영화화된 부분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부분은 꼭 읽고 가시기를 권합니다. --------------------------------------- 『나니아 연대기』는 어떤 책? 출간 이후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판타지 소설의 바이블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니아 연대기' 7편의 모험담이 합본으로 출간되었다. 신학자인 C.S. 루이스가 쓴 유일한 판타지 소설이자, 그와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J.R.R. 톨킨이 이 작품을 본 뒤 '반지의 제왕'을 집필했다는 일화로도 너무나 유명한 작품. '나니아'의 창조부터 멸망을 그리고 있는 이 연대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영화팬과 나니아팬 모두를 즐겁게 하고 있다. 합본 나니아 연대기에는 150여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을 정리한 인명 사전과 연대표, 부분 및 전체 나니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 작가 C.S. 루이스는 누구?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 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면서 소설, 평론, 동화 들을 썼다. 지성적이며 논리적인 신학자로서 그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헤아려 본 슬픔』, 『고통의 문제』 들이 작품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나니아 연대기』는 그의 유일한 판타지 소설이면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종교를 넘어서서 보편성을 얻는 주제들로 전세계인의 공감을 얻는 흥미진진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나니아 연대기』 중 <마지막 전투>는 이 연대기를 대표하여 카네기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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