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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특별한 책'이라기 보다는 그저 ‘아주 특별한 책’

『남자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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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은 딱 한 권 꼽는 내 인생의 특별한 그 책은 아닐지언정, ‘아주 특별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요즘 정말 보기 힘든 ‘아주 솔직한 책’이니 그럴 수밖에.

‘내 인생의 특별한 책’ 한 권을 꼽으려니 참 막막하다. 사람이 삼십 몇 년 살았으면 그런 책 한 권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난 그렇지 못하다. 유년시절의 끝자락에서 만난 『10대들의 꿀단지』와 『황홀한 사춘기』가 잠깐 경합을 벌이기는 하였으되 지면의 성격에 맞지 않는 듯하여 제쳐 놓고 나니, ‘그 한 권’을 추려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런데 나더러 ‘내 인생의 특별한 냄새’를 꼽아보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책 냄새’를 꼽겠다. 그 냄새는, 금방 눈 오줌을 또 금세 마렵게 만드는 그런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툭 하면 ‘이상한 나라’의 입구로 빨려 들어가 요술차 타고 딱부리 휘두르던 ‘폴’(버섯돌이와의 사이가 원만치 않았었다)을 기억하시는지. 폴에게 삐삐의 마술봉이 있었다면, 나에겐 이 책 냄새가 있었다. 그 냄새 속에 서기만 하면, 저 폴처럼 나도 이상한 나라로, 또 다른 세상으로 꼼짝없이 빨려 들어갔었다.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입구에서 뭉클뭉클 새어 나오던 그 신비한 냄새.

그런데 난 요즘 그 책 냄새를 잊고 산다. 어느 새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게 있어 ‘어른’은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법을 잊어버린 이’의 다른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멋대가리 없는 어른에게도 좋은 책이 가끔씩 찾아든다. (내가 찾아낸다는 말을 도저히 못 하겠다.) 그렇게 찾아드는 책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 공통점은 ‘솔직함’이었다. 요즘처럼 자기 자신을 꾸미고, 감추고, 부풀리기 바쁜 세상에서 솔직할 수 있다는 건 용기가 있다는 걸 뜻한다. 이제부터 얘기하려는 이 책은, ‘철저히 내 기준에 의하고, 내가 본 중에서’라는 조건을 단다면 ‘제일 용감한 책’이다. 바로 『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과정』(전인권, 푸른숲, 2003)이 바로 그 책이다.

저자 전인권은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3년간 공부해서 대학교수가 된 이다. 시쳇말로 ‘똑똑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이게 정말 똑똑한 사람인가 싶다.

‘나는 ‘대한민국이란 사회 전체’ 또는 ‘한국문화의 구조적 특징’을 학술적으로 논의하려는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불과 두 달이 지나지 않아, ‘한국은 무슨 한국이냐, 먼저 너 자신의 꼬라지나 정확히 알아라.’는 양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11p

이 대목을 보고 예감했다. 이 책은 진짜로구나. 제 꼬라지도 모르고 전 우주를 아우르려는 꼴불견들의 번드르르한 헛소리는 아니겠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내 예상이 정확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강원도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5남매 중 하나로 태어난 전인권이란 아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대한민국이란 사회 전체’를 논의하려던 사람이 그걸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 자신의 꼬맹이 시절 이야기라니!

‘어머니는 젓가락으로 먹을 것을 집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당신은 잘 먹지 않고 내가 먹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나 음식 한 귀퉁이를 조금 떼어 맛을 보며 “야, 이것 아주 맛있구나!”하며 장단만 맞추었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엄마, 이것 하나 먹어봐!” 하고 권하면, “아주머니,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만드셨수?” 하며 좌판 주인에게 말을 걸며 딴청을 피웠다.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혼자 막 먹었다. 나는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아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뭐야, 겨우 이딴 흔한 얘기들로 뭘 어쩌자는 거야!’ 할 수 있겠다. 흥분할 필요 없다. 전인권은 ‘자기 자신의 꼬라지’나 제대로 알자고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는 최소한 비겁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그 꼬맹이의 ‘이딴 흔한 이야기’들을 계속 듣다 보면 생각이 점점 달라진다. 전인권의 예리한 시각은 그 흔한 이야기들 속에서 모종의 규칙을 찾아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아버지도, 나도, 그가 찾아낸 그 규칙 안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의 ‘꼬라지’를 알고자 했던 저자의 용감한 시도 앞에서, 우리는 제 자신의 ‘꼬라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만큼 전인권의 해석은 대담하고도 예리하다.

전인권은 이 책을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같은 한 방안에 엄격히 구분되어 존재했던 ‘아버지 공간’과 ‘어머니 공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간단한 구분은 이 책을 계속 이끄는 주제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구분은 마치 거짓말처럼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경향을 술술 풀어내는 열쇠다. 정말 거짓말 같지만 정말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믿기 어려운 얘기다. 그런데 진짜다. 일단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밑줄 빡빡 긋고, 별표까지 친 대목 하나 훔쳐보자.

‘물론 학교에서는 국어와 산수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한 아이의 자아와 개성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나 교육 프로그램은 없었다. 오히려 학교는 나의 자아를 무시하고 동송초등학교 학생이라는 새로운 자아를 주입시키려고 했으며, 동송초등학교가 내세우는 진선미의 깃발 아래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는 학교교육을 통해 나의 자아를 풍성하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 234p

‘선생님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 대학교 식으로 자꾸 진급을 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학교 밖을 나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부모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부모가 되고, 기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취직을 한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 (...) 특별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고 진급은 된다. 참으로 한국인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은 선택이 아니라 진급이다.’ - 235p

이 대목을 읽을 때 난 정말 소름이 끼쳤다. 정말 예리한 지적이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이, 위의 간단했던 그 구분으로 술술술 풀려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래서 말했지 않은가. ‘정말 거짓말’ 같다고. 직접 읽어 보기 전에는 믿기 어려울 거라고.

정말 그런지 궁금하긴 하지만, 인문교양서적들이랑 좀처럼 친하지 못 했던 과거의 경험 때문에 이 책에 대한 부담을 갖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다.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겠다. 전인권은 이전의 ‘똑똑한 사람’들처럼 권위적이질 못 하다. 처음 보는 아이에게 말을 걸 때 ‘몇 살이냐’를 묻지 말고 ‘난 전인권인데 네 이름은 뭐냐?’라고 물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니까 말 다 했다. 심지어 그의 책에서는 이런 대목을 만나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다.

‘주산부 4인방은 그곳에서 진흙을 얻어다 엉뚱한 놀이판을 벌였다. ‘쥐방울’이란 별명을 가졌던 민현이가 그 일을 선동했다. 녀석은 진흙으로 여러 가지 모양의 자지도 만들고 보지도 만들었다. 꼬불꼬불하다고 해서 ‘스프링 자지’, 앞은 뭉툭하고 뒤는 가늘다고 해서 ‘방망이 자지’, 한번 들어가면 안 나온다고 해서 ‘말뚝 자지’, 가늘다고 해서 ‘실 자지’, 물렁물렁하다고 해서 ‘물 자지’, 아기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고추 자지’ 등 민현이가 생각해내는 자지의 종류는 무궁무진했다. 못된 놈의 대명사 ‘김일성 자지’, 일본 사람 ‘빠가야로 자지’, 미국 사람 ‘조지 부라운 자지’, 아프리카 흑인 ‘붕가붕가 자지, 동남아시아 ’까무잡잡 자지‘도 있었다. (...)’ - 273p

전인권은 고백하고 시작한다. 자기 자신의 ‘꼬라지’를 알고자 이 책을 썼다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그가 ‘대한민국 사회 전체’의 꼬라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몇 번이고 무릎을 쳐 가면서. 그 과정이 마치 거짓말처럼 유쾌하고 기특하다. 그래서 이 책은, 딱 한 권 꼽는 내 인생의 특별한 그 책은 아닐지언정, ‘아주 특별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요즘 정말 보기 힘든 ‘아주 솔직한 책’이니 그럴 수밖에.


인터넷 성인방송 대본작가, 잡지사 기자, 인터넷 신문사 기자, 만화스토리 작가, 출판사 직원 등 ‘글’과 관련된 일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낙향하여 조그만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음.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이 태어난 집 앞에 ‘서호원 선생 생가’라는 표지판을 서게 하는 것. 그러나 시 당국에서 당구장 주인의 생가 앞에 표지판을 세워줄 리 없다는 판단 하에 오래 전부터 품어 온 서슬 시퍼런 꿈 하나를 꼭 이루어야만 하는 상황. 그 꿈 역시 ‘글’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 알려진 상태.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 사람들을 불러 놓고 낭독할 연설문을 구상하다 잠이 들 때도 있는, 어이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서른 셋의 남자.
(★ 서호원 님 블로그‘operion이니까...’ //blog.yes24.com/oper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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