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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제목 정하기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1월호
사실 내게는 집필 초기 단계에서부터 제목이 무척 중요하다. 글을 쓸 때 주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어서 그런 것 같다. 내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먼저 정리하고 소설을 쓴다.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프로젝트 이름’에 반영되곤 한다. (2020.11.02)
얼마 전에 출간한 에세이 『책, 이게 뭐라고』는 표지뿐 아니라 제목을 정할 때에도 고심이 많았다. 출판사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한 후보는 ‘책, 이게 뭐라고’와 ‘읽고 쓰는 인간’, 그렇게 두 가지였다. 편집부와 마케팅팀은 ‘책, 이게 뭐라고’를, 영업팀에서는 ‘읽고 쓰는 인간’ 쪽을 선호했다.
양측이 격하게 대립했던 것은 아니고 ‘A도 괜찮지만 B가 더 낫지 않아?’ 정도의 분위기였다. 제목 후보 ‘책, 이게 뭐라고’에 대해서는 ‘내용과 잘 어울린다, 더 흥미롭게 들린다’는 호평이 있었던 반면 ‘너무 가볍지 않으냐, 검색할 때 같은 이름의 (내가 진행했던) 팟캐스트와 겹쳐서 나오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도 있었다. ‘읽고 쓰는 인간’에 대해서는 ‘저자와 어울리는 제목이다, 인문서 느낌이 나서 타깃 독자층을 넓힐 수 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너무 무겁다’는 반박도 나왔다.
내 마음은 한동안 왔다 갔다 했다. 결국 책 제목은 ‘책, 이게 뭐라고’로 정해졌는데, 그게 원고를 쓸 때 가제이기도 했다. 가제를 최종 제목으로 결정한 게 잘한 선택이었다는 확신이 지금은 든다. ‘읽고 쓰는 인간’이라는 말도 아까웠는데, 출판사에서 책 표지의 저자 이름 옆에 그 문구를 넣어주었다.
책 제목을 정하느라 막판까지 진통을 겪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당선, 합격, 계급』 같은 책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게 제목을 정한 편이다. 그 책 원고를 쓸 때 가제는 ‘문학상을 타고 싶다고?’였다. 편집부에서 떠올린 제목 후보 중에는 ‘좁은 문’도 있었는데, 이 얘기는 민음사 편집자들이기도 한 서효인 시인과 박혜진 평론가가 함께 쓴 독서 에세이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에 나온다. 그렇게 함께 꽤나 애를 먹다가 어느 날 ‘당선, 합격, 계급’이라는 문안이 떠올랐는데, 바로 이거다 싶었다. 편집자도 환영했다. 그때까지 혼자 메모장에 적었던 제목 후보가 서른 개쯤 됐다.
제목 후보로 서른 개라는 수치는 객관적으로 많은 걸까, 적은 걸까? 잘 모르겠다. 어느 지인 편집자는 그가 작업한 장편소설을 위해 제목 후보를 100개나 만든 적도 있다고 자기 경험을 소개했다. 그걸 회사 동료들에게 보여주며 의견을 묻고, 종이로 출력해 사무실 입구에 붙여서 약식 투표를 벌이기도 했단다.
흥미롭게도 표지 디자인에 대해서는 작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젊은 국내문학 편집자들도 제목에 대해서는 퍽 엄격한 태도를 보인다. 그만큼 책에서 제목이 중요하다는 뜻이렷다. 작가가 정한 가제가 편집자의 요구로 바뀐 경우도 드물지 않다. 당사자들이 언론에 공개한 최근 사례만 봐도 다음과 같다.
『82년생 김지영』은 조남주 작가가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을 때 제목이 ‘19820401 김지영’이었다. ‘80년대생 여성’이라는 요소를 좀 더 강조하고 싶었다는 게 편집자 의견이었다고 한다. 김혜진 작가의 『9번의 일』도 원래 작가가 정한 제목은 ‘철탑을 오르는 사람’이었는데 편집부가 반대했다고 한다. 최지월 작가의 『상실의 시간들』은 한겨레문학상에 당선될 때 제목이 ‘만가’였다. 최 작가는 출간 이후 인터뷰에서 “아직도 ‘만가’가 더 어울리는 제목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 경우에는 『댓글부대』의 원래 제목이 ‘2세대 댓글부대’였다. 그런데 담당 편집자가 ‘2세대’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집필 초반까지 가제가 ‘헌법 14조’였다. 편집부에서 고개를 갸웃하기에 며칠 동안 궁리해서 지금의 제목을 생각해냈다. 두 책 모두 현재의 제목이 마음에 든다.
반면 『표백』, 『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산 자들』 등은 원고를 처음 쓸 때 생각한 제목이 그대로 최종 제목이 되었다. 몇몇 작품 중에서는 캐릭터나 줄거리를 정하기 전에 제목부터 정한 것도 있다.
사실 내게는 집필 초기 단계에서부터 제목이 무척 중요하다. 글을 쓸 때 주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어서 그런 것 같다. 내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먼저 정리하고 소설을 쓴다.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프로젝트 이름’에 반영되곤 한다. 소설을 쓰는 기간에는 다른 일을 할 때도 원고를 잊지 않기 위해 그 작업명(이자 가제)을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머리를 감으면서 “산 자들 산 자들 산 자들……”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식이다. 그러니 원고를 완성하기 전이라도 제목은 꼭 있어야 한다.
이런 방식이자 습관 덕분에 내 책들 제목은 거의 모두 꽤 직설적이다. 신문기자 경험도 분명히 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 신문기사 제목들 참 직설적이지 않은가. 신문사에서 기사 제목은 편집 기자가 달지만, 취재 기자도 편집 기자들의 노하우에 영향을 받게 된다. 나는 내 책 제목으로는 짧고 힘 있는 제목을 선호하는데, 그런 기호 역시 글을 쓰는 방법이나 신문기자 경험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내 방식이자 습관에 큰 불만은 없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내용을 알 듯 모를 듯하고, 은근한 향취를 풍기는 소설책 제목들에 부러움도 품는다. 최근의 한국 소설 사례를 들면 『바깥은 여름』, 『오직 두 사람』, 과거의 해외 소설 예를 들자면 『노르웨이의 숲』이나 『굿바이, 콜럼버스』 같은 제목들. 짧고 시적이면서 파워풀한 제목은 더 좋다. 『아버지들의 죄』라든가.
반면 『느림』이라든가 『만남』 같은 제목은 그게 아무리 밀란 쿤데라의 선택이라도 나는 반대한다. 좀 흐리멍덩하게 들리지 않나? 같은 작가의 한 단어짜리 제목 책이라도 『불멸』이나 『정체성』은 그보다는 나은 것 같다. 『허즈번드 시크릿』이나 『오베라는 남자』 같은 책들도 내용은 참 좋았지만 제목은 내게 썩 밋밋하게 느껴진다. 남편의 비밀을 다룬 소설 제목이 ‘남편의 비밀’이고, 오베라는 남자가 주인공인 소설 제목이 ‘오베라는 남자’라니. 그런데 아내는 두 책 모두 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한다. 부부 사이에서도 제목 취향은 이렇게나 다르다.
몇 가지 편견을 더 풀어놓자면, 나는 한국 작가가, 특히 문학 작가가, 자기 책 제목을 영어 단어로 정하는 게 어째 어색하다. 『뤼미에르 피플』을 낸 사람으로서 떳떳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문장형 제목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이건 정말 논리적인 이유를 댈 수 없는 개인 취향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럼에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는 내 인생 책이고…….
어떤 제목이 좋은 제목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설명이 있다. 첫 눈에 눈길을 끌고, 소설 내용이 어떤 건지 다 알 듯한 느낌은 피해야 하고, 다 읽은 뒤에는 ‘아하, 이런 뜻이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부르기 좋고 검색하기 쉬워야 한다는 것 등등.
그 조언들에 내가 하나 더 보탠다면 본문과의 어울림을 들겠다. 소설 내용이 강건하고 씩씩하다면 문체도 제목도 그런 느낌인 게 좋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런 일치와 조화의 추구를 ‘스타일’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렇다면 제목을 정하느라 끙끙 앓으면서 소설가들은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쌓아 올리는 셈이다. 나도 스타일이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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