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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로 핥는 사랑 <무뢰한>

<무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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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그의 애인, 그리고 형사라는 설정은 질척거리는 진창에 발을 담근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데, 전도연과 김남길이 숨길을 터준 캐릭터를 통해 <무뢰한>은 이상하게도 음습하면서도 우아한 색감을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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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눅하고 축축하다. 습기 찬 바닥을 기어가며 사는 이들에게 찾아온 감정은 그렇게 젖어있다. 무례한 남자의 감정은 부드러워 본 적이 없어 직선이고, 사는 게 지긋지긋한 여자의 마음은 잔뜩 휘어 꿈틀거린다. 결국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날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닿을 듯 말 듯 오가던 감정들이 채 소진되지도 못하고, 다시 눅진거리는 바닥에 가라앉는다. 내가 보는 것이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교감인지 두 사람이 나눈 것이 사랑인지 끝내 의심하게 되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사랑 혹은 감정은 거칠다. 여자는 순수해서 마음이 헤프고, 괴로울 정도로 한 여자의 곁을 맴도는 남자는 야생동물처럼 날이 섰지만, 그 지독한 경계심은 상처받은 짐승의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는 여자가 자신의 상처를 쓰윽 핥아주길 바란 건지도 모른다. 뜨겁게 달아오르지도, 격정적으로 서로를 탐하지도 않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눅눅하게 젖은 장작으로 가득한 화로 같다. 그렇게 각자의 삶 속에 파고든 습기처럼 두 사람의 교감은 목적지 없이 허둥대다가 끝내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그렇게 두 남녀를 바라보는 것은 하드보일드 느와르 등의 장르적 수식어를 붙여도 무방할 만큼 어둡고 음습하지만, <무뢰한>의 본질은 멜로다.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은 살인범 준길(박성웅)을 잡기 위해 그의 여자 혜경(전도연)의 주위를 맴도는 형사 재곤(김남길)의 이야기다. 재곤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준길을 꼭 잡으려는 재곤은 혜경이 일하는 술집에 영업상무로 위장 취업하여 그녀의 곁을 맴돈다. 늦은 밤에는 그녀의 집 앞에서 잠복근무를 한다. 밤낮으로 혜경의 주위를 맴도는 재곤의 태도에는 언젠가부터 균열이 생긴다. 범죄자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형사, 할리우드 느와르에서 종종 보아온 익숙한 설정이지만 <무뢰한>은 다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멜로는 <무뢰한>의 본질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멜로와 다르다. 이야기의 결은 단순하지만 거친 관심의 표현은 진심에 가 닿지 못하고 다층적이다. 재곤의 마음이 혜경에게 가닿지 않는 것처럼 두 남녀의 감정은 끝없이 흔들리고 끝내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그들이 나눈 감정이 혀로 핥아주는 야생동물의 관심이었는지, 애틋함인지, 혹은 축축하게 젖은 상대의 삶에 대한 동정이었는지 영화는 끝내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한 번도 제대로 아껴주는, 혹은 진심으로 돌봐주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듯한 혜경과 재곤의 건조한 마음과 달리 눅눅하게 젖은 그들의 삶은 지나치게 이질적이라 보는 이의 마음을 아련하게 만든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마구 뒤섞이고, 어느 누구의 마음도 본질에 가닿는 법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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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여자와 형사의 사랑이라는 소재가 지닌 상투성과 달리 오승욱 감독은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두 사람 사이에 떠도는 미묘한 공기를 오롯이 담아낸다. 사회의 정의와 도덕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 <무뢰한>은 그런 점에서 느와르 영화의 본능적 야생성을 담아낸다. 하지만 느와르적 정서나 범죄 미스터리 자체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다. 안성기, 박신양을 통해 한국형 느와르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2000년 <킬리만자로> 이후 15년 동안 오승욱 감독의 이야기는 장르 영화 속에서 훨씬 깊어졌다. 밑바닥 남자의 사랑, 느와르 멜로라면 최민식이 연기했던 <파이란>이나 임창정이 연기한 <창수>를 떠올리겠지만, <무뢰한> 속 여주인공은 단순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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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그의 애인, 그리고 형사라는 설정은 질척거리는 진창에 발을 담근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데, 전도연과 김남길이 숨길을 터준 캐릭터를 통해 <무뢰한>은 이상하게도 음습하면서도 우아한 색감을 띈다.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색감이 없는 화면도 격앙된 감정이나 쏟아내는 대사가 없는 배우들의 연기와 어우러져 기묘한 아우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무채색의 화면 덕분에 배우들의 연기는 더 다양한 색채를 띠게 되었다.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이 무례해 보이는 김남길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지만, 역시 <무뢰한>은 전도연을 통해 제대로 숨을 쉬는 영화다. 밑바닥 인생을 기어가며 사는 혜경 역할의 전도연은 숨을 쉴 때조차 혜경을 표현한다. 이미 전도연을 통하면 연기가 아닌 인물을 보게 된다. <무뢰한> 속에는, 우리가 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한 번도 몰랐던 전도연이 들어 있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과 입가의 주름, 때론 뒤로 젖히는 머리카락까지도 연기를 하는 전도연 덕분에 <무뢰한>은 하드보일드 느와르 멜로라는 장르 위에 섬세한 드라마를 한 겹 더 입는다. 그리고 끝내 뿌옇게 드러내지 않는 밑바닥과 소용돌이 친 내면의 깊이를 굳이 한 번 더 상상하게 만드는 것은 온전히 전도연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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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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