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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오랜만에 훌륭한 소설을 만났다

『파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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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온 생은 너무 ‘날 것’이라, 때로는 가공이 필요하다. 유치하고, 황당하고,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의 가공이 필요하다. 가끔은, 그래야 자신의 생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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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7. 


매력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빠져버리는 게 가능할까.
전혀 불가능하진 않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런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독서의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아니 흔하다 못해, 가슴 깊이 각인을 새기는 독서는 대부분 이렇게 재회했을 때 이뤄진다.
오늘, 읽다 만 『파이 이야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5. 28. 


어제 일기를 멋지게 마무리 짓기 위해, 일부러 첫 감상을 늘어놓지 않았다. 글에는 항상 마지막 문장이 중요하니까. 
 
어제 저녁에 간단한 식사를 하기 전까지 온종일 『파이 이야기』를 읽었다. 사실, 결말을 알고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봤다는 사실이 이 소설의 가치를 전혀 빛바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빛나게 했다. 위대한 작품은 두 번째 접할 때 더욱 빛나듯이, 소설 초반부의 거의 모든 문장과 에피소드가 후에 발생할 사건과 의미에 대한 복선이자 메타포였다. 줄거리를 모르고 본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을 소설일지 모르겠으나(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 빠른 독자들에게는 지적 호기심을 유발할 것이다), 결말을 아는 나로서는 이해와 공감을 넘어, 때로는 감탄을 하며 읽었다. 
 
논문을 분석하듯, 밑줄을 긋고 개별 문장의 의미를 여백에 써내려가며 읽었다. 그러다 잠시 기지개를 켠 뒤, 내 책이 어느새 밑줄과 노트로 빽빽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파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데, 잡문 원고마감을 우선해야 한다. 원고를 쓰고 싶지 않다. 오랜만에 훌륭한 소설을 만났다.
 


6. 1.

내 소설과 여타 칼럼을 마감하고 다시 『파이 이야기』를 집어 들었다. 주인공인 파이가 인도에서 캐나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이제 난파를 당했다. 파이처럼 내 몸도 지치고, 고통스러워진다. 내가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호랑이 한 마리랑 함께 있는 것 같다. 머릿속이 무거워지고, 입술이 타는 것 같다. 


 파이의 고통이 책장을 넘기는 내 손을 타고, 내게도 전해진다.
 


6. 3. 


태평양에서 표류 중인 인도 소년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거북의 피를 마시고, 살코기를 먹기 시작했다. 거북의 등껍질을 생선회를 뜨는 도마로 쓰고, 음식을 섞는 그릇으로 쓰는 지혜까지 발휘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입에 호랑이 똥을 한 덩어리 넣었다가, 발과 발목이 붓기 시작했다. 어쩐지, 나도 감기몸살에 걸려버렸다. 고통 속에서 계속 독서를 하고 있다. 음식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고, 배변을 하면 온몸에 힘이 다 빠져버린다.
 


6.4.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밤을 새운 후, 책을 읽다가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깨어난 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이렇게 반복했다. 파이와 함께 있는 기분이다.
 


6. 5. 


파이는 여전히 태평양 한가운데에 뱅골 호랑이 한 마리와 함께 있다. 이제 겨우 222쪽까지 읽었다. 이 책은 총 400페이지에 달한다. 기필코 이 책을 다 읽어서, 이번 회 ‘절도 일기’에 그 감상을 남길 것이다. 파이가 살을 에는 태양과 타는 목마름과 극심한 공포 속에서 견디고 있듯이, 몸살을 겪으며 꾸역꾸역 한 페이지씩 읽었다.
 


6. 6. 


원래는 오늘이 <절도 일기> 마감이지만, 이 책을 좀 더 읽기로 했다. 이대로 쓸 수는 없다. 파이가 아직 태평양에서 버티고 있다.
 


6.7. 


원고 마감이 네 시간밖에 남지 않아, 표류하는 이야기 중 60페이지 정도를 속독했다. 그리고,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목마른 자처럼 결말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속독하는 가운데에도 식인충이 사는 섬에 표류한 이야기, 인육을 먹는 이야기, 호랑이와 대화를 주고받는 환상 신(scene) 등은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사실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갈구하는 내 호기심이 책장에 머물러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이가 처음 구명보트에서 식수를 발견하고 2리터의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처럼, 이 이야기의 문장들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그러다 보니, 결국 지금 마감 시간 15분을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만큼 나는 이 소설에 강하게 매료됐고, 집착했다. 그렇다! 이것은 집착이다! 한동안 무언가에 집착한 적이 없는, 아니 살면서 집착이라고는 거의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 소설에 집착하듯 매달린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미학적인 문장도, 화려한 수사로 공들인 문장도 아니었다. 소설 속의 해운회사 직원이 남긴 보고서의 담백한 문장이다. 소설의 마지막 단락을 여기에 옮긴다. 

‘유일한 생존자인 인도인 피신 몰리토 파텔의 사연은 이를 데 없이 힘들고 비극적인 상황에서 용기와 인내를 보여준 놀라운 이야기다. 이 조사관의 경험으로 볼 때, 그의 이야기는 난파선 역사상 어느 사건과도 견줄 수 없다. 파텔만큼 오래 생존한 조난자는 없었다. 더구나 벵골 호랑이와 함께 생존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파이가 조사원에게 들려준 생존 이야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현실적이고 잔혹한 이야기, 다른 하나는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이야기. 조사원이 후자를 택해 보고서에 쓴 것을 보고, 규정짓기 어려운 떨림을 느꼈다. 
 
나는 이게 바로 소설이 필요한 이유라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온 생은 너무 ‘날 것’이라, 때로는 가공이 필요하다. 유치하고, 황당하고,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의 가공이 필요하다. 가끔은, 그래야 자신의 생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이야기다. 나락에 떨어진 한 소년이 구조받기 위해, 아니 구조받기 전까지 자신이 한 행동을 용서 받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을 구원받기 위해, 신 앞에서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을 납득할 만한 이야기로 바꾸어가는 과정. 살면서, 입으로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았을 뿐, 우리는 얼마나 여러 번 가공한 이야기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납득시켰는가. 
 
책을 덮었다.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 나니, 파이는 책장 위에만 있지 않았다.
내 안에도 파이는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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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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