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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때의 음악 친구

건스 앤 로지스 <Pat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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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혼자 아프니까 고통 두 배에, 몹시 고독하고 서럽지만 이것 참 <페이션스>를 듣자니 건스 앤 로지스 엉아들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곁에서 휘파람을 불어주며 나를 위안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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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원고 마감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데드라인에 쫓기는 걸 못 견뎌 마감 일주일 전에 교정까지 마친 원고를 모서리 맞춰 정돈해둬야만 한다고 어느 수필에 썼다.

 

나는 하루키 씨가 맘에 들기 때문에 그런 비인간적인(?) 꼼꼼함도 본받아 보고 싶었다. 인기 있는 작가란 뭔가 스킬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번 실패했고, 흉내 내려니 가랑이가 쭉 찢어지는 느낌이고, 고로 이번 주 턴테이블 원고도 절대 미리 써두지 못했다. 결국 또 마감에 쫓기는 신세.

 

실은 요즘 되는 일도 없고, 중심 저기압 980헥토파스칼 쯤 되는 대형 우울증이 의식에 전격 상륙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만 마감 매직(마감일 전날 쫄려서 고도의 집중력으로 폭풍집필 하게 되는 기현상. 세계 7대 미스터리)만을 믿었다. 그런데 마감 전날 덜컥 장염에 걸려버린 게 아닌가. 으아 이럴 수가. 엿 됐다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배때기는 펜치로 꽈배기를 만드는 것처럼 아프고, 화장실 문턱과 똥꼬는 닳아 없어져 넋이라도 있고 없고, 땡 여름에 파카를 꺼내 입는 오한과, 해머드릴 편두통까지 겹쳤는데 글을 어떻게 쓰나 걱정이었다. 늘 그렇듯 칼럼에 개인적 사설이 이래 길어서 송구스러운 것도 걱정이고.

 

하지만 장염에 걸려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강력하던 우울증이 싸악 빠져나간 것이다. 우울증이 장염보다 서열이 낮은 건지 알아서 짜진 모양이다. 앞으로 우울에 빠지면 잽싸게 뭘 잘못 먹으면 되는 걸까?


어우 그럴 수는 없다. 우울증이 훨씬 덜 아프다. 어쨌든 앓느라 한잠도 못자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원고를 꾸역꾸역 쓰는데 집 앞에서 굴착기가 공사를 시작했다. 이건 뭐, 마감 매직도 전혀 안 통하고 딱 망하라는 얘기 아닌가.

 

그렇다면 맛 좀 봐라, 하고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페이션스(Patience)>를 크게 켰다. 이럴 때일수록 강력한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다. 원래 오늘은 명왕성에 간 ‘뉴 호라이즌스 호’를 소재로 우주에 대한 얘기와 <M83> 음악의 가공할 공간감에 대한 썰을 풀려 했는데 <페이션스>를 듣다 보니 안 되겠다. <M83>은 다음 주에 쓰거나 말거나 하고, 오늘은 건스 앤 로지스다. 


아앜 역시나 <페이션스>의 도입부에 흐르는 휘파람 소리를 듣는 순간 통증이 경감되면서 어디선가 추억의 훈풍이 불어온다. 
 
속초에 몇 달 산 적이 있었다. 푸른 동해 바다와 신선한 오징어와 설악의 스카이라인은 참 좋은 벗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외롭고 허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 친구가 놀러왔는데 밤에 둘 다 갑자기 토스트가 먹고 싶었고, 시내에서 늦게까지 문을 연 집을 발견해 좋아라 하고 사 먹었다. 먹을 때 좀 시큼한 느낌이었는데 문제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다 먹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 우리 둘은 데굴데굴 구르며 복통에 시달렸다. 심각한 배탈이었다. 새벽이라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설령 응급실에 가고 싶어도 둘 다 휴대폰을 들 기력조차 없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꽁꽁 앓은 건 포경수술 이후로 처음이었다. 다음 날 장염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같이 수액 주사를 맞으며 기력이 좀 돌아오자 나는 옆 침대의 친구에게 휘파람을 작게 불어 주었다. <페이션스>멜로디 였다. 그 순간 누군가와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게 참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다시 장염을 앓으니 그 작은 병실의 휘파람 소리와, 말간 햇살과, 동해바다 냄새가 추억으로 떠오른다. 만약 혼자 낑낑 아팠었다면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추억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혼자 아프니까 고통 두 배에, 몹시 고독하고 서럽지만 이것 참 <페이션스>를 듣자니 건스 앤 로지스 엉아들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곁에서 휘파람을 불어주며 나를 위안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추억의 뮤지션 건스 앤 로지스는 아시다시피 80년대 롹밴드다. 엘에이 메탈이라 불린 비파괴 공법의 롹음악을 했다. 대중성을 추구하긴 해도 기본이 롹 밴드라 꽤 시끄러운데 몇몇 조용한 곡들 가운데 이 곡 <페이션스>가 가장 듣기 좋다. 세 대의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부드럽게 전개되는 곡의 흐름은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고, 곡의 제목대로 ‘인내심’이란 중요한 가치를 재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기존의 건스 앤 로지스 전매특허인 보컬 엑슬 로즈의 ‘섹시 허세’, 기타리스트 슬래시의 ‘감성 허세’ 없이 담백한 톤으로 감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곡이다.

 

곡의 내용은 안 좋게 보면 헤어진 여자 못 잊고, 그녀가 했던 말이나 곱씹다가, 자기변명 좀 하다가, 기다리겠다며, 당신이 필요하다며 외치는 살짝 찌질한 스토리지만 몇 부분의 가사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기운 나게 만드는 언어들이기에 충분하다.

 

단지 일말의 인내심이 필요해 천천히 하렴 우린 잘 될 거야  

시간을 빨리 돌릴 수는 없잖니 다만 일말의 참을성이 필요해 

 


이 곡은 오피셜 뮤비보다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의 이 라이브 버전이 더 좋다. 아마추어 밴드가 커버 한 듯 어설퍼 보이는 사운드가 훨씬 인간적 이어서다. 특히 기타리스트 슬래시는 술을 마셨거나, 멤버들과 다퉜거나, 갑자기 장염에 걸렸거나 그런 느낌으로 연주한다. 내겐 뱀 들고 ‘후까시’ 잡는 오피셜 뮤비 보다 훨씬 친근하게 들렸다.

 

페이션스(Patience인내심)는 페이션트(Patient환자)와 한 끗 차이의 단어다. 술 마시고 이 곡의 제목을 떠올릴 때 종종 헷갈린다. 사는 일이 뭔가 안 풀리고, 할 일 많을 때 몸이 아프고, 좌절감과 통증과 외로움이 태풍처럼 밀려 올 때 음악이라도 없었음 어쩔 뻔 했나싶다. 음악이 있는 한 인간은 절대 혼자가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다 죽어가는 절망적 환자가 되는 게 아니라 음악과 함께 인내하는 사람으로 견뎌내는 것도 불과 한 끗 차이일 것이다. 인내는 고통보다 서열이 높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무라카미 하루키 씨도 위의 라이브처럼 좀 인간적이면 어떨까 싶다. 마감에 쫓기는 압박감에 쫄리는 맛을 공감할 수 없으면 외로운 작가 아닌가요. 아저씨도 늘 음악이 친구인 건 알지만 슬슬 외롭지 않나요? 아니면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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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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