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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분위기를 경감시키는 감성 백신

크리스 가르노 <Rel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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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짜증날 땐 짜장면은 옛말이고, 나는 크리스 가르노(Chris Garneau)를 듣기로 한다. 오늘의 주제곡 <릴리프Relief>를 듣는 거다.

chris garneau 2007 music for tourists.jpg

 

십몇 년 전 사스(SARS)가 진상칠 때 하필 유럽 여행 중이었다. 사스는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해 인근의 홍콩, 대만, 싱가폴 등의 아시아에 집중적인 피해자를 낳으며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진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이었다. 유럽 대도시 차이나타운마다 갑자기 파리가 날릴 지경으로 중국인 기피 현상이 벌어졌다. 나는 중국에 가본 적도 없었는데 유럽 애들은 동양사람 국적을 워낙 구분 못해 순조롭게 여행 다니기 곤란했다. 지하철 타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다른 칸으로 이동하고, 술집에 들어가면 대놓고 나를 째려보며 나가버리기도 했다. 페스트로 몇 천만이 죽은 역사 때문일까. 동양인이면 일단 보균자로 보는 분위기였다. 나는 사스가 원망스러워 숙소에 돌아오면 냇킹콜(Nat King Cole)의 퀴사스 퀴사스 퀴사스를 들으며 쓸쓸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때 우리나라엔 감염자가 거의 없었다. 마늘과 김치 면역력 세이브 설도 있었지만 다꽝국 일본엔 아예 감염자가 없었으니 낭설에 가깝고, 당시 정부가 초기에 선발 등판해서 잽싸게 호투한 게 컸다고 본다. 그렇게 멀쩡하고 당당한 청정국 선수 신분으로도 어깨 펴고 여행할 수 없다는 게 좀 억울하긴 했다. ‘중국인 아님’ 이라 적힌 모자라도 쓰고 싶었지만 유럽에서 그런 걸 어디서 사나. 할 수 없이 사람들 많은 데 피해 다니고, 혹여나 사래가 들려 기침이라도 할까봐 밖에선 물과 음식도 고양이처럼 조심조심 삼켰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파리의 어느 지하철역 벤치에 앉은 늙은 주정뱅이한테 결국 싫은 소리를 들었다.  


 “너네 나라로 썩 꺼지지 못해? 이 바이러스야!” 


듣자마자 빡쳐서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킬까 했지만 웃어 넘겼다. 나는 멀쩡한 선진국가의 성숙한 여행자라는 자부심으로 오해를 이해하는 태도를 보여야 옳았다.
 
또 다른 심각한 호흡기 증후군인 메르스 사태로 메롱인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완전 다르다. 보건 자부심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여행 가고 싶어도 쫄려서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 사스 때와는 달리 우리가 세계 2위 감염국이자 민폐국으로 찍혔는데 나가서 무슨 푸대접을 받을지 안 봐도 HD화질인 것이다. 역병이 도는 비극도 서러운데 국제적 오명으로 쪽팔리기까지 해서 짜증 두 배다. 마침 딱 돈이 없어 어차피 아무데도 못 나가니까 짜증 세 배. 세월호 때도 그러더니 초기 어눌한 정부 대처가 사태를 키웠음에도 반성보단 엄포, 대책보단 쇼를 더 선호하는 구태에 짜증 네 배.

 

 아아 짜증날 땐 짜장면은 옛말이고, 나는 크리스 가르노(Chris Garneau)를 듣기로 한다. 오늘의 주제곡 <릴리프Relief>를 듣는 거다. 

 

ChrisGarneau.jpg


어쩐지 달달하고 우아하고 건조하면서도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이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을 왜 짜증날 때 듣느냐면, 그의 목소리엔 짜증기라곤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곡의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에서도 성질내거나, 울분을 토로하지 않고 감정을 꾹꾹 다독이는 성숙한 뉘앙스를 아슬아슬 유지하는 게 아주 딱 그만이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담백한 곡물빵에 저염 버터를 부드럽게 발라놓은 느낌과 유사한데 그게 또 전혀 전형적이거나 촌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 수수한 빵을 감각적 인테리어의 스카이라운지 바에서 예쁜 접시에 플레이팅 해놓고 은제 식기로 살짝살짝 잘라 먹는 분위기다. 하나 더, 그런 고급스런 느낌에 상반될 정도로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약한 바이브레이션 발성이 음절 끝부분마다 적절하게 섞여있는 게 말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크리스 가르노 좋아하시는 분은 그의 목소리 간지를 작가라는 인간이 요렇게 밖에 묘사 못하나 싶겠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크리스 가르노는 이로운 전염성을 가진 감성 바이러스다. 아니 ‘감성 백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나른하고 차분한 음색을 들으면 강력한 항체가 형성되면서 몸 안의 짜증 바이러스들이 쫓겨 나가고 만다. 그야말로 속이 끓어 콧김이 나온다 싶을 때 들으면 특효가 있는 음악인 것이다. 


추어탕 집에 붙어있는 ‘미꾸라지의 효능’ 같은 촌스런 안내문처럼 음악이 꼭 무슨 효능을 가져야 한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이 음악 릴리프(Relief)는 제목 그대로 안도, 안심, (통증, 불안 등의)경감, 완화, 등을 선사한다. 지금 메르스 사태를 한 달 넘게 겪는 우리들에게 사뭇 필요한 음악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최근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다 2차 노가리집으로 가는 길에 어느 뮤직 카페 간판을 보고 혹해서 들어갔는데 오디오 장비가 참 좋고 시디가 만 오천 장 있는 곳이 얻어걸렸다. 오디오 쪽엔 문외한이지만 스피커도 굉장히 비싼 거고 앰프도 끝내주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보유한 음반들은 장당 만원씩만 쳐도 일억 오천 아닌가 싶어 무릎이 떨렸다. 그래선지 맥주도 몹시 비쌌지만 비싼 스피커가 내는 훌륭한 음색은 돈이 비싸다다는 느낌을 깨끗이 삭제해버렸다. 즉각 크리스 가르노를 신청했더니 바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monk to bach.jpg


바로 앞에서 라이브를 감상하는 것 같은 현장감 그 자체였다. 우울해서 외출도 안 하고 집에서 혼자 술 마시며 컴퓨터 스피커로 음악 듣고 산 게슴츠레한 내 신세를 걷어차며 꾸짖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의 향연이었다. 그런 멋진 시스템을 가진 카페에서 음악을 감상하자 내 두뇌 속의 구질구질한 공기들이 시원하게 환기되며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상업적인 음악 말고 나머지는 찬밥 취급받는 천박한 사회 분위기에서 망하기 딱 좋은 업종인 뮤직 카페가 깔끔한 문화적 공간으로 강남 한복판에 아직도 건재 하는 게 몹시 반가웠다. 손님이라곤 우리 일행밖에 없었지만 고음질로 듣고 싶었던 이런저런 신청곡들을 써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묵묵히 음반을 찾아 틀어주는 중년의 사장님이 정말 멋진 존재로 보였다. 
 
거기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전반적으로 싸구려 후진국이 되어버린 것 같은 분위기가 요즘 들어 더욱 염려되는데, 짜증만 내고 있으면 변하는 게 없을 거고, 환기 시키듯 어떻게든 개인이라도 감각적으로 멋있게 살며 자기 주변을 점점 괜찮은 공기로 감염시켜 나가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감각의 감염이 자꾸 확장된다면 후진을 멈출 섬세한 사회적 항체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음악이라는 아름다운 백신이 그런 태도를 도와주지 않을까. 꽃청년 크리스 가르노의 목소리를 통해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크리스 가르노의 세 번째 내한 공연때 어떤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나는 나를 슬픈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익살스럽고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라서 심각해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출처- Elle 인터뷰)

 

그 말을 통해 딱 하나 우려되던 점도 해소되었다. 엘리엇 스미스 때문에 실은 조금 걱정했는데 크리스 가르노라면 정말이지 하루 종일 들으면서 왕창 감염되더라도 우울증 같은 부작용이 안 생길 것 같다. 아아 기분이 후질 때마다 마음껏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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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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