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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의 식물로 맺어진 세계] 10리터의 세계

식물로 맺어진 세계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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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욕망이 그를 움직였을까? 인간이 절대 거주할 수 없는 물속 세계, 거기에 시선이라도 거하게 하려는 욕망, 자연의 단면을 그대로 자르고 싶은 욕망, 그러나 내가 만든 유일하고 완벽한 풍경을 가지고 싶은 욕망, 그 곁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욕망... (2023.05.24)


이 취미의 출처도 아마 아빠일 것. "너도 새우 키워볼래?"라는 친구의 말에 일말의 고민 없이 어항을 방에 들인 것은 어릴 적 보고 자란 것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겠지. 주말에 아빠는 식탁만한 수조에서 물을 빼내고, 물고기를 옮기고, 모래와 자갈을 씻고, 물을 채우고, 다시 생물들을 입수시키느라 오후 내내 베란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정비를 다 마친 물속 세상은 꽤 근사하고 좋은 기분이 들었지만, 엄연히 아빠의 취미였고, 단 한 번도 내 어항을 갖고 싶다거나 내 취미가 될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20여 년 뒤 내 책상 위에 10리터짜리 수조가 어엿하게 놓이게 되었다.

빈 수조가 왔을 때 책상에 놓아보니, 늘상 쌓여있는 책들 속에 어항이 파묻힐 형국이었다. 책 기둥을 만들지 않을 재간은 없었고, 어항 위치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책 기둥의 평균 높이 정도로 10리터의 물과 수조 무게를 받혀줄 튼튼하고 안정적인 선반이 필요했고, 가구를 만드는 친구 '민수'에게 정식으로 제작 의뢰를 하게 되었다.

"시집을 꽂을 수 있는 작은 책장이면서, 위에는 어항을 올려둘 수 있는 선반을 만들어줘."

민수는 나의 책상과 어울리는 알루미늄 소재로, 어항의 무게를 잘 견딜 수 있도록 측면이 이중 구조로 된 선반을 제작해주었다. 우리는 선반 이름을 '새우온더북'이라고 지었다.

깨끗이 씻은 모래를 수조에 깔고, 물을 채워 며칠 두었다. 물이 채워진 사각의 공간,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밀도로 채워진 세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의 방이 조금은 넓어졌다. 며칠 뒤 친구로부터 새우 몇 마리와 돌 하나와 수초 두 가지를 받아왔다. 수초 하나는 돌에 뿌리가 붙어있고 동그란 잎사귀를 가진 '아누비아스 나나'였고, 하나는 가는 잎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타누키모'였다. '아누비아스 나나'의 넓은 잎의 앞뒤에서 새우들은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좀 지나니 잎 위에 새우들의 배설물들이 보이기도 했다. 타누키모는 매우 빠르게 몸집을 불려 나갔는데, 활착 없이 수중에 떠 있어 물살을 받으며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면 거기에 매달린 새우들도 함께 돌았다. 우주를 관망하는 존재가 있다면 지구에 매달려 일생을 뱅글뱅글 도는 지구인들을 이렇게 바라보려나.




그 뒤로 내 어항에는 하나둘씩 다양한 수초들이 들어와 살았다. 강아지 꼬리 같이 생긴 '붕어마름', 작은 나비 같은 '개구리밥', '미니물배추'라고 불리는 '피시티아', 톱니 모양의 잎을 가진 '하이그로필라 피나디피다',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미니 삼각 모스', 미역처럼 생긴 '펠리아 모스', 직접 채집해 온 제주피막이 등... 책상 앞에 앉아 물의 세계를 조목조목 살피다보면, 새우만큼이나 수초에 시선이 오래 머무르곤 했다. 보통 흙에 뿌리를 박고 고정되어 있는 공기 중의 식물보다 수중 식물들은 그 존재 방식이 훨씬 다양해보였다. 어떤 것은 돌에 붙어 있고, 어떤 것은 모래에 뿌리를 내리고, 또 어떤 것은 수면 위에 떠 긴 뿌리만 물속에 담그고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정처 없이 물속을 헤매고 다녔다. 새우들은 수초들의 각각의 특성들을 잘 이용하며 지냈다. 어떤 것은 집의 지붕처럼, 어떤 것은 식탁처럼, 어떤 것은 놀이기구처럼, 어떤 것은 계단처럼, 또 어떤 것은 무덤처럼. 겨우 10리터의 물로 이루어진 세계는 내가 사는 대기권만큼이나 낯설고 익숙한 것들로 우글거리며 하나의 생태계와 풍경을 이룬다.

물속 풍경에 대해 관심을 갖다보니 아마노 타카시라는 인물을 알게 되기도 했다. 일본의 전 경륜 선수이자 사진작가였는데, 오지를 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자연 그대로를 수조에 담고 싶어 수초 어항 전문 회사를 설립했다고 한다. 그는 2015년 포르투갈 리스본 해양수족관에 길이 40m 16만 리터의 물이 사용된 세계 최대 자연 수족관을 마지막으로 작업하고 생을 마감했다. 어떤 욕망이 그를 움직였을까? 인간이 절대 거주할 수 없는 물속 세계, 거기에 시선이라도 거하게 하려는 욕망, 자연의 단면을 그대로 자르고 싶은 욕망, 그러나 내가 만든 유일하고 완벽한 풍경을 가지고 싶은 욕망, 그 곁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욕망...

오늘도 나의 10리터의 세계를 본다. 현실에 치이고 떠밀리기만 하는 나에게는 작지만 그 어떤 것보다 명징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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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박세미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과 건축역사·이론·비평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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