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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의 식물로 맺어진 세계] 식물의 집

식물로 맺어진 세계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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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필요에만 반응하는 것이 건축이라고 생각 안해요. 건축은 현재성을 얼린 결과이지만, 미래에 상황이 바뀌더라도 그 시간을 잘 견딜 수 있는 건축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23.04.12)

ⓒ 최인아

믿고 싶지 않지만, 월급이 들어오면 절반 가까이 식물과 관련된 것들을 사 모으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 계산해보니 정말 그랬다. 식물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흙, 돌멩이, 전지가위, 물조리개, 조명, 식물 영양제, 화분 같은 것들을 사 모았다. 하나씩 살 때는 그리 큰 금액이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했지만, 그때 나는 꽤 오랫동안 진정되지 않는 감정의 양동이를 주체하지 못해 쏟아버릴 창구를 찾아 해메고 있었고, 그것이 아마도 식물 또는 그와 관련된 쇼핑이었던 것. 인터넷에서 식물과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보는데 시간을 쓰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고민 없이 돈을 썼다. 

그 중 화분이 최대 관심사였다. 어떤 화분에 어떤 식물을 심을지 생각하는 일에 빠져있었고, 급기야 식물의 컨디션은 안중에 두지 않고, 미친듯이 분갈이를 해댔다. 잦은 분갈이에 지쳐 세상을 떠나는 식물들이 속출했지만, 쉽게 그만두지는 못했다. 시멘트 화분, 플라스틱 화분, 토분, 유약 화분, 동그란 화분, 네모난 화분, 긴 화분, 납작한 화분 등... 처음에는 이것저것 들이다가 나중에는 취향을 찾기도 정착하기도 했다. 테라코타 화분을 만드는 덴마크 브랜드였는데, 적당히 빈티지한 느낌에 다양한 디자인이 나와 마음에 들었다. 키우는 식물보다 빈 화분이 많아진 지는 오래였고, 어느 날 온갖 화분이 방안에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싶기도 했지만 역시 멈추지는 못했다.


ⓒ 최인아

우연히 SNS에서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보던 화분과는 좀 다른 개념이었다. 토분같아 보였는데, 다양한 모양의 판이 구조를 이루며 화분 공간을 구획하고 있었고, 화분에 심겨진 싸리나무가 선이 예쁜 가지들을 화분의 담장 너머로 쭉 뻗고 있었다. 당장 그 화분을 갖고 싶기도 했지만, 만든 사람에 대한 궁금증도 그에 못지 않았다. 화분의 모습에서 풀풀 풍겨져 오는 분명한 건축의 향기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검색 엔진을 총동원하고, SNS의 태그를 따라가며 추적한 결과, 을지로 쪽에 있는 한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된 최인아 작가의 <식물의 궤도> 시리즈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회사에서 업무를 하다말고, 앞에 앉아 있는 후배 기자에게 대뜸 "이 화분 너무 멋지지 않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라고 말했고, 후배는 "어! 그 갤러리 제가 아는 분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하더니 고맙게도 바로 물어봐 주었다. "선배! 그 화분 만든 사람 건축가래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세상에, 너무 기뻐 즉시 그 갤러리의 SNS로 메세지를 보냈다. 다행히 갤러리에서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어 최인아 작가와 메세지를 나눌 수 있었다.



"○○갤러리에서 전시하셨던 화분 작품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제가 그것을 구매할 길이 있을까요?"

"혹시 어떤 분위기의 식물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여리여리한 수형, 꽃피는 식물 선인장류 등) 화분을 식물에 맞춰 만들고 있어서요."
 
"저는 덩굴류나 고사리, 목본류를 좋아해요."

"판상형 토분의 경우 물레로 작업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성과정에서 잔금이 생길수 있는데, 내구성에는 이상이 없지만, 이 부분도 고민해보고 결정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괜찮습니다."

(...)

"화분이 완성되었어요. 주소 알려주시면 직접 문 앞으로 배송해 놓겠습니다."

"작가님 괜찮으시면, 차 한잔만 살짝 하고 가실 수 있을까요?"

"좋지요!"



꽤 크고 무거운 화분을 들고 카페로 들어오는 최인아 작가를 보고 나는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바지에 넉넉한 흰티를 입고 수줍게 나타난,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성 건축가. 건축 전문지 기자로 일하며 늘 동년배 건축가, 특히 여성 건축가와의 우정에 목말랐다. 정작 잡지는 내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더니, 생각치도 못하게 식물이 연을 맺어주었다. 우리는 카페에서 화분을 사이에 두고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기자'와 '작가'라는 호칭 대신 서로 이름 부르기로 해요", "다음에는 술 한잔 해요" 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 최인아

집에 와서 화분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자니, 인아 씨가 말한 그대로였다. 화분은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큰 방에는 아디안텀이, 작은 방에는 아스파라거스 나누스가 거주하는 집. 각자의 땅이 나눠져 있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연결되어 있는, 벽의 높낮이가 조절되며 사이사이로 바람 길이 나 있는 집. 인아 씨는 사람의 집을 설계하듯 식물의 집을 설계하며, 어떻게 두 식물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식물과 화분이 함께 어떤 풍경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했다. 화분은 잘 설계된 집처럼 거주하는 식물의 특성에 맞게 사방의 고유한 입면을 갖고 구조적으로, 기능적으로, 미학적으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존경하는 한 건축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현재의 필요에만 반응하는 것이 건축이라고 생각 안해요. 건축은 현재성을 얼린 결과이지만, 미래에 상황이 바뀌더라도 그 시간을 잘 견딜 수 있는 건축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아 씨가 지은 식물의 집에 대한 나의 믿음이 그랬던 것 같다. 그 화분이라면 매순간 환경과 반응하면서 변화하는 두 식물의 삶을 잘 견뎌주고 존중해줄 것 같다는 생각. 아니 시간이 갈 수록 두 식물과 집이 온전한 하나의 풍경으로 향해 갈 것이라는 믿음.

믿기지 않지만, 인아 씨의 화분을 갖게 된 이후 빈 화분은 더이상 쌓이지 않았다. 나는 또 출렁이는 감정의 양동이를 들고 어디에서 냅다 엎어질까 전전긍긍하는 듯 했지만, 무분별한 화분 쇼핑 중독(?)에서만큼은 빠져나왔고, 화분의 표면에 물 때가 아름답게 입혀질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두 식물은 잘 살고 있다. 집이 좀 좁은가? 싶기도 하지만 알아서 다이어트를 하며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인아 씨와의 우정도 차근차근 자랐다. 5월에는 인아 씨를 따라 도자기 공방에 가 직접 화분을 만들어 보기로 하여, 엄청 기대 중이다. 집 설계는 15년만에 처음이다. 부디 식물과 화분을 통해 나만의 풍경을 이룩할 수 있기를.


ⓒ 최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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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세미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과 건축역사·이론·비평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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